(그림) Yoojin Kim (woodhill, 6th)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서른 하나에 날 낳으셨다. 눈깔사탕 공장을 경영하시던 할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덩그라니 남은 것이 커다란 집 한채, 할머니는 궁여지책으로 하숙을 시작하셨고 아버지는 두살 연상인 하숙집 딸을 사랑하는 더벅머리 남학생 역으로 등장하신다. 심파극처럼 내 부모님의 인연은 그리 시작되었다. 엄마는 ‘저 같쟎은 것이 내게 편지질해야!’ 라며 친구들에게 쏙닥였고 그 정겨운 수다는 엄마의 친구분으로부터 한자락 추억으로 내게 배달되었다. 우리 엄마는 머리숱이 많지 않고 작은 키에 하체만 길쭉하시다. 하얗고 결고운 피부에 툭 불거진 이마와 동그란 얼굴을 가지셨다. 자식자랑을 삼가는 성정임에도 비교적 갸름한 내 얼굴형만큼은 가끔 입에 올리며 흐뭇해 하신다. 남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엄마로부터 진작 나는 많은 칭찬이나 사랑의 말을 듣고 자란 것 같진 않다. 자식은 속으로 이뻐해야 한다는 것이 엄마 신조셨고 그렇게 실천하신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사랑은 결코 말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배워두었다. 그렇지만 손주들에겐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시니 나는 또 그러려니 할 뿐이다.

우리 엄마는 자식을 친구로 삼진 않으셨다. 가끔 내가 내 딸들에게 ‘엄마는 너희의 best friend야’ 라고 말하며 실로 그렇게 되고자 희망을 품는 것은 아마도 그에대한 미련때문일지 모른다. 엄마는 딸인 나하고 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 친구분들과 외출했다가도 하교시간엔 꼭 집에 들어와 계시니 탓할 일은 없었다지만 말이다. 외할머니로부터 ‘니 에미는 그저 친구만 빠쳤어야~’ 하는 말씀을 들은 후에는 엄마는 그런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다.

우리집은 동네 사랑방이었다. 수험생 딸이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든 어쩌든 동네 아줌마들이 오시면 그저 기쁘게 맞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리고는 한 나절이 되도록 다과를 즐기며 시끌시끌 수다판이 벌어진다. 맛난 음식을 만들면 이웃과 나누기 바빠서 가족들은 두 번 먹을 엄두를 못냈다. 가끔 투덜대기라도 하면 ‘음식은 나눠야 맛이지.’ 하실 뿐이었다. 엄마에겐 내 가족만 챙기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신조가 있었던 것이다. 결혼 후, 평생 손님이라는 사위를 먼저 챙기는 엄마와 아들이 우선인 시어머님으로 인해 나의 설자리가 없어졌다. 한국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남녀불평등’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엄마에겐 딸과 아들이 있었으나 우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평등하게 대하셨거늘, 사위는 또 다른 자리에 있는가 보았다. 나는 남편한테 ‘나만 손해야!’ 라고 투덜거리곤 했다.

엄마는 음식 버리는 일을 천벌 받을 짓으로 여기신다. 그래서 거둬먹는다,는 표현을 자주 쓰셨다. 식구들보다 한 템포 늦게 식사를 시작하여 남은 음식을 처리하듯 드시는 걸 의미한다. 그걸 알았던 나는 맛있는 음식을 부러 맛없다 하며 남기곤 했다. ‘쟈는 참 이상해야. 이게 왜 맛없다는 건지…?’ 의아해 하시는 엄마와 속으로 사랑 숨바꼭질을 하는 묘미야말로 참 맛난 것이었다. 가끔 거침없이 맛있는 걸 제 입으로 가져가는 우리 딸들을 보면서 아직 철이 덜 난건지 시대가 달라진 탓인지 아리송하게 씁쓸할 때가 있다. 풍요로워지면서 잃어가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미풍이리라… 이 곳 아이들이 먹던 걸 덥썩덥썩 버리는 모습을 보면 쉰 밥을 물에 헹궈 드시는 엄마가 떠오른다. 은행원이신 내 아버지 덕에 생활이 궁핍하지도 않았고, 6.25때마저 저장해 둔 쌀로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았다던 엄마의 어린시절로도 유추하기 힘든 모습이다. 다른 건 그러려니 해도 쉰 것을 다시 가열하거나 헹궈 드실 때면 나는 펄쩍펄쩍 난리를 쳤다. 그치만 당신의 고집을 꺾을 수도 없는 딸인 것이다.

불교에서 천주교로 전향하신 엄마는 종교의 진리를 깨닫고 그 힘에 자신을 의지하며 사신 분이기도 하다. 평생 당신의 종교를 남편과 자식들에게 강요한 적 없으시거늘  몇달 전엔 난데없이 ‘너도 김서방따라 교회에 나가지 그러냐.’라는 말씀을 하셨다. 도미 후 혼자 신실한 크리스챤이 된 남편이 일요일이면 ‘처’없는 사람처럼 혼자 교회에 다니니 안 된 모양이셨다. ‘교회에 다닌다고 뭐 나아진 게 있어야 말이지’ 나는 농담조로 그렇게 말을 뱉었다. ‘그러면 그 이상 어떻게 잘하랴, 너도 참…’ 내 엄마가 내 남편 편을 들어주는데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뒤늦게 유학하고 이제 겨우 사회에서 굳힐 자리를 찾느라 이렇다하게 사위노릇 한 번 못했어도 그저 딸을 아껴주는 모습이 기특하고 예쁘기만한 장모의 사랑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참 단순하다. 보내주신 홍삼농축액을 쓰다고 사위가 마다한다는 걸 아시고 이번엔 캡슐정까지 따로 챙겨주신다. 사위사랑이 딸사랑인 것이 이 나이쯤 되니 절절히 와닿는다. 자식 사랑을 말없이 하시거늘 그 육친의 깊은 정은 내 안에 그득하다!

내 나이 마흔 하나이니 엄마는 일흔 둘, 노인이 된 우리 엄마는 오늘도 노인정이다, 동창 모임이다 바삐 놀러 다니신다. 딸 하나 있는 것이 미국에 뚝 떨어져 살면서도 엄마 걱정 덜 할 수 있는 것은 친구 빠치는 엄마의 성정 덕이 크니, 세상사는 세옹지마, 만사에 한가지 진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