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나

앨범속의 옛 사진 들추어 보듯

먼지 앉은 노트를 꺼내어

추억을 더듬었었다

더운 비가

눈 덮인 대지를 말간하게 씻겨준 오늘은

몹씨도

그리워

낡은 사진같은

봄 이야기

봄아, 봄아, 어서 와요, 손짓하며

들추어 본다 봄 이야기

(2008년 5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엔, 벚꽃과 철쭉, 목련과 라일락, 무식쟁이 나로선 보도 듣도 못한 수많은 꽃나무들이 만발하고 있다. 연푸른 하늘에 드리운 햇살과 지난주 수북히 내려준 봄비 덕에 꽃들은 생애 절정의 수려함을 드러내고, 덕분에 사람들이 웃는다. 작고 작은 나도 따라 웃는다. 일년의 삼분지 일은 겨울이요, 나머지를 사이좋게 나누어 세 계절이 찾아오는 엔도버의 봄. 요즈음 일부러 하이웨이를 피해 국도를 찾아 돈다, 차창밖에서 너울대는 꽃향과 자연의 미려함에서 헤어나오고 싶지 않은 욕망때문에…

 내가 다니던 대학의 대강당 옆에 봄의 화신인 자목련 한 그루 있었는데 그 그늘 아래서 꽃같은 향내를 풍기는 처자들이 사진을 찍는다. 그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가슴에 파고들면 봄은 발광충처럼 빛을 발하며 폭발한다. 20여년 전 그곳엔, 나와 내 친구들,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너울댔더랬는데… 자목련, 흰목련이 지면 철쭉과 개나리, 사향장미가 화들짝 피어나고 교정은 울긋불긋 화려함의 절정이 된다. 여유로이 보조를 맞춘 친구들 발걸음은 날것들의 날개짓처럼 경쾌하고 나무둥치나 벤치는 꿀 발라놓은 비스킷인양 우리를 유혹했다. 유난히 봄을 타던 친구의 꾐에 넘어가 수업을 땡땡이 치고 등꽃 아래 파묻혀 히히덕거리던 볼발그레한 우리들… 그땐 무슨 꿈을 꾸었던가?

 봄은 대학축제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이 대학, 저 대학을 기웃하며 젊음이 가면 못누릴 향연처럼 가식을 벗고 시간도 벗고 옷과 책의 무게를 벗는다. 막걸리가 뿌려진 잔디밭에서 개미가 취하고 푸른 악다구니가 파도를 친다. 파도가 넘쳐 해일도 인다. 해일은 젊은 지성과 미덕을 쓸어가고 텅빈 공간 안에 모두의 노래소리만 남는다. 유난히 ‘작은 연못’이란 곡을 좋아하던 젊은 내가 노래를 한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그 연못엔 예쁜 붕어 두마리 살고…’ 그때로부터 먼 옛날이 된 지금, 다시 그 연못엔 예쁜 붕어 네마리쯤 살고 있지 않을까, 엔도버 우리집처럼.

 여자만 다니던 내 학교에 축제 때면 남정네들이 넘실거렸다. 그 중엔 초대받은 남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량배들도 있다. 백 해면 백 번, 빼놓지 않고 그들이 온다. 그들은 남의 광장을 점거하여 커다란 원으로 둘러선다. 고함을 치고 제 학교 응원가를 외치고 발을 구른다, K대님들. 꼬아 만든 새끼줄로 둘둘 두루미 엮듯 말아서 담밖으로 내쳐 봤더라면, 신성한 학문과 여인들의 성터에서 웬 소란이죠? 호통쳐 봤더라면 … 흘끔흘끔 곁눈질로 쯔즛…,하며 지나치기만 한 세월도 이제사 안타깝다.

 막 소개팅에서 만난 남학생이 건네준 티켓으로 친구와 함께 S대학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초청가수 콘서트에 간 적이 있었다. 꽤 값을 치루어야 했던 티켓 두 장, 분명 고스란히 내게 넘기려고 산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에 그리 수줍었을까, 그는 ‘공연 관람하시고 우리 동아리 부스에 와서 음료수나 팔아주십시요.’라고 정중히 청했다. 콘서트만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 들은 풍문으론 그 남학생은 동아리 부스에서 목을 빼고 기다렸다 한다. 콘서트에 같이 가자하면 내가 거절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란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그 남학생만큼 수줍음 타던 내 남편은 어느 5월 하루,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층계참에서 사랑고백을 했다. 16세기 기사가 무릎꿇고 청혼하는 모습의 패러디처럼, 내가 있는 곳보다 낮은 층계참에 내려서서, 오랫동안 삭혀진 감정을 벌벌 떨며 꺼내 놓았다. 그 모습이 멋없어 아니올시다, 했다. 그날 그는 여의도부터 마포대교를 건너 종각까지 하염없이 걸었다던가. 봄 날의 꽃향도 덜익은 오디즙처럼 썼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봄, 결국 멋없는 그 사람과 결혼을 했다. 피천득씨의 인연, 아사코가 난 아니었던 게다. 지금은 둘도 없이 사랑하며 가끔씩 투닥거리며 산다. 그치만 투닥거리기 보다 항상 토닥거리며 살고 싶다.

투르게네프의 짝사랑엔 이런 글귀가 있다. ‘인간은 식물이 아니어서 오래오래 꽃을 피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 당시 나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습니다.’ 봄처럼 화사하고 어여쁜 청춘. 시간을 잡아매지 못해 얼굴엔 주름이 지지만 모든 이의 청춘은 벗꽃잎과 함께 날아가 하늘의 별이 되리라. 언제라도 바라보며 미소지을 수 있도록 반짝반짝, 별이 되었으리라.

봄은 언제나 어여쁘게 온다. 마흔된 이의 봄은 추억까지 더듬느라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