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 할머니

지니라는 순하고 참하게 생긴 아이가 있었다. 가끔은 고집을 부리지만 그 모습이 결코 밉상으로 보이지 않는 매력적인 아이였다. 지니 동생 설이는 맑고 커다란 눈을 가졌고 길다란 속눈썹에 종종 눈물방울을 매달곤 했던 응석장이로 기억한다. 눈 내리는 날 태어나서 설이(雪)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뽀얀 피부에 입술까지 빨개 내 눈엔 백설공주처럼 어여쁜 아이였다.

그 두 아이를 기르시던 할머니 이야기를 하려 한다. 지금 여든쯤 되셨으려나? 일하는 아들 내외를 대신해 집 안 일과 육아를 담당하시며 은근히 사남매(오남매?)나 되는 자식들 사이에 건재한 당신의 파워를 긍지로 여기며 당당히 사시던 쿨한 분이셨다. 깡마른 몸매에 몸빼를 입으시고 팔을 휘휘 젓는 대자걸음으로 아드님과 함께 지니를 마중나오셨을 때 처음 만났던가? 우리집 큰 딸 유진이와 같은 킨더에 다니는 한국아이가 이웃에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던 시절, 생각해 보면 지니 할머니를 만난 것이야 말로 내겐 더없는 행운이었던 것같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젊은 나이에 혼잣 몸으로 장사도 하시고 음식도 만들며 자식들을 키우신, 시원시원하니 통 크고 배짱도 두둑하신 지니 할머니. 토지에 나오는 두만어미처럼 산을 산이라 하고 바다를 바다라 하시는 솔직 담백한 성격이 정말 매력적인 분이시다. 좋은 옷이 생기면 맞을 만한 남에게 내어주시고 당신보다 못한 사람들 사정 헤아리는 따스한 멋쟁이시다. “애들을 엄마손으로 키우고 먹고 살만만하면 그러면 장땡이여. 인생 별거 있나…” 나는 할머니가 그만만하면 성공하신 인생이라고 생각하기에 할머니 말씀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할머니를 뵈면 인간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현학을 위한 학식도 아니요, 윤기 흐르는 미도 아니요, 저승갈 때 짊어질 수 없는 금방석도 아니다. 그저 인간다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정,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사리분별, 솔직할 수 있는 담백한 용기, 그리고 건강이야말로 한 생을 살다 가는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보물임을 알게 하신다. 일흔 중반의 연세에 두살배기 통통한 설이를 등에 업고 뚝딱뚝딱 집안일을 해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운전을 못하시는 할머니는 한국 비디오를 큰 가방 가득 빌려다 놓고 오며가며 보는 게 취미셨다. 그 연배의 여느 노인들처럼 몸은 미국에 머물러도 혼은 한국에 사실수 밖엔 없으리라. “저 남자는 처음 보는데요?” 그 때만해도 한국 비디오를 보지 않았던 나보다 연예인에 대한 최신 정보가 빠삭하셨다. “에릭이라고 요즘 아주 인기있는 청년이여.” 자녀분들이 한국 TV를 시청할 수 있는 위성안테나를 달아드리겠다해도, 그건 놓쳤을 때 rewind를 할 수 없으니 싫다 하셨단다.

“유진이 엄마, 뭐해? 하는 일 없으면 놀러와!” 가끔 이렇게 전화를 잘 하셨다. 이래저래 말씀만 하시다 끊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건 마치 친정엄마가 딸내미 생각나 목소리라도 듣는다는 형식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발가락 만지면서 말씀하시는 버릇이 있었다. 놀러가면 반가우셔서 먼저 이야기 봇따리를 푸신다. 그리고 그 손으로 먹거리를 듬뿍 챙겨주시곤 했다. 소녀시절 유별스러웠던 깔끔의 전력은 다 워디 갔는지^^ 끼니때는 밥을, 새때는 간식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꿀같이 달게 먹었더랬다. 진정 혀보다는 마음으로 맛을 느꼈으리라. 우리 가족은 할머니 덕에 한국명절을 제대로 만끽 할 수 있었다. 집 안 제사 때마저 꼬박꼬박 우리를 챙겨 그 때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을 차려 주셨다. 남편이 학업을 마쳐서 그 곳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사간 후에도 한 달이면 두서너번씩 전화를 하시며 “유진이 엄마 없으니 내 오른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어!”란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주변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시곤 했다.

그러시던 할머니가 화난 목소리로 전화를 끊으신 적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 때가 마지막으로 걸어오신 전화였다. 친정부모님이 집에 와 계셨을 때였는데 친구 좋아하시는 엄마덕에 동네 한국 할머니들이 자주 우리집에 오셨고 그 정신없는 정황속에서 내가 성의없게 전화를 받았음에 틀림없다. 양해를 구하고 끊느라 ‘집에 엄마 친구분들이 오셔서 조금 정신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이 나의 실수였던 것 같다. 당신의 오른팔처럼, 친구처럼, 막내딸처럼 여기시던 마음에 너무도 큰 서운함을 안겨드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후 내 쪽에서 몇 차례 전화를 드리긴 했지만 할머니는 더이상 전화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이 없더라도 끊지말고 성의있게 전화를 받았어야 했다. 할머니의 서운함은 나에대한 커다랗고 진실된 애정을 의미했다. 애정이 크셔서 서운함도 크셨던 것이다.

마지막 안부전화 드린지가 2년여 전인가 보다. 그간 정신없이 내게 많은 일들이 있었더래도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는가. 바쁘다는 말은 마음의 不在를 본때없이 내뱉는 일일 뿐이다. 이젠 결코 그런 서운한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살아생전 한번 더 뵈야할텐데… 원체 건강하신 분이니 아직은 건재하시리라 믿지만 이제부턴 자주 안부를 여쭈어야 겠다. 그리고 이번엔 꼭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그 때 너무 감사했고 지금도 할머니 참 그리워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