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릿한 냄새가 달려든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뿌린다. 한약냄새에 생선 비린내 그리고 김치냄새도 섞여 있을 것이다. 방방이 돌며 창문을 열어 제친다. 햇살은 고운데 바람이 매섭다. 바람이 성난 고릴라처럼 터무니없이 집 안을 휩쓸고 다닌다. 곧 냄새가 옅어지리라. 냉장고에 붙여 놓은 종이들이 마구 펄렁대다 떨어진다. 종이를 좇다보니 부엌바닥에 떨어져 있는 음식 부스러기들이 보인다. 아린이의 소행이다. 흘리지 말고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대도 그건 작은 아씨 능력밖의 일인가 보았다. 자루걸레를 집어든다. 싱크의 개수대엔 어제부터 쌓인 그릇들이 수북히 들어차 있다. 저녁때 남편이 dish washer에 넣어줄 것이다. 이제는 어질러진 부엌을 대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3개월이란 기간동안 난소에 생긴 물혹과 싸우고 있다. 한약 먹고 침 맞고 뜸 뜨고... 덕분에 집 안이 엉망이 되었다. 오렌지 하나를 까서 오물거리며 밀대로 바닥을 서너번 밀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회사를 Verizon으로 바꾼 후부터는 수화기 액정에 거의 unknown caller로 표기된다. 쓰잘데기 없는 액정판! 나는 누군지 모르는 상대를 향해 헬로우,하고 말문을 튼다. 교회 권사님이시다.

“아린이 엄마, 아린이가 우네요…”

아린이가 울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가 같이 있으면 좋겠다면서…”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가 같이 있지 않은 일이 하루이틀 사이의 이야기는 아니건만… Good Friday행사로 교회에서 영화를 보여준다기에 아린이를 그곳에 막 떨어뜨리고 온 참이었다. 새삼스러운 지지배. 미소가 슬금 터지는 걸 참으며 중얼거린다. 일요일이면 엄마없이 교회에 다닌 지 어언 4년이 넘었쟎아! 나는 막 지나온 길을 신나게 되돌려 달려간다. 내 몸이 아프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차에서 내려 교회건물로 뛰어가는데 바람이 사정없이 품으로 감겨든다. 엄마 품 그리는 아린이처럼…

언제까지나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정된 언제까지는 부모가 아이들 세상의 전부일 때가 있다. 나는 특히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일종의 부모된 자로서의 책임감을 물씬 느끼곤 한다. 여행지에서 아이들은 웃고, 떠들고, 흥미로워 하며 신나 한다. 그 곳이 어딘지, 집에서 얼마나 먼 곳까지 와 있는지는 상관도 없이 부모가 함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할 때 바로 전에 언급했던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해일처럼 밀려 온다. 아이들에겐 부모가 우주요, 울타리이다. 나의 작은 몸뚱이가 우주도 되고 울타리도 된다는 사실은 감동이다.

“엄마가 안 데리러 오면 어떻해?”

왜 울었냐는 질문에 대한 아린이 대답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따가 데리러 올께!’라는 한마디 약속이 이리도 중요했음을 새삼 깨닫는다. 아직 내 품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아린이를 껴안으며 아린이도 내 세상의 전부여야 함을 뼈져리게 느낀다. 단 제가 들어 앉아 있겠다는 날까지만… 왜냐하면 여기 날개를 마구 퍼덕이며 둥지를 사정없이 떠나려는 또 한 딸내미가 있으니...

영화가 끝나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은 후에도 더 놀고 싶어하는 아린이에게 언니 데리러 가야한다고 말해준다. 거의 만 하루만에 보게 될 큰 아씨. 어제 슬립오버하러 친구집에 가서는 지금껏 놀고 있다. 요즘은 그런 일이 많아서 아린이가 ‘Oh, no. again?’ 할 정도이다. 집에 돌아온 큰 아씨는 피곤해서 눈이 풀린 채 소파에 늘어져 있다. 노는 것 하나는 일등으로 잘하니까 안 봐도 뻔했다. 온 몸을 불살랐을 테니 얼마나 피곤할까. 어느 정도로 불사르는가 하면, 놀다가 얼굴이 볼거리하는 것처럼 부풀어 오른 적도 있고, 잇몸과 편도선이 붓는 경우도 있었다. 푹 자고나면 깨끗이 없어지는 현상으로 보아 피곤을 무릅쓰고 놀았던 탓임에 틀림없다. 셋을 셀만큼의 여유도 없이 곯아 떨어져서는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헛소리를 하면서 눈을 못 뜨는 경우는 보통이요, 6학년이나 된 언니가 6살짜리들(동생 친구) 생일파티 하는 데도 따라가서 놀고 싶어한다. 며칠 전엔 학교에서 주관하는 파티란 파티는 다 참석한 후 학교 프로젝트를 밤늦게까지 하느라 컨디션이 엉망인 채로 주평가시험을 보기도 했다. 참말, 노는 일엔 특급 달란트를 가진 큰 아씨이지 않은가! 친구를 좋아하니 친구들도 큰 아씨를 좋아한다. 오,노! 또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어느새 피곤은 사라지고 생기가 되살아난다. 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의미있어지고 그 안의 공감대가 무엇보다 소중해지는 시기지만서두… 엄마의 품 뿐이랴, 이제 6년정도 지나면 집을 떠나야 하는데 이 큰 아씨는 벌써부터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듯 보인다.

큰 아씨는 7시 20분이면 스쿨버스에 올라 오후 3,4시에 집에 오면 학교 숙제, 플륫 연습, 책 읽기 정도를 일상적인 루틴으로 가진다. 별달리 노는 스케줄이 없으면 손에 책을 달고 사는 큰 아씨가(나름 독서광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전화통을 붙잡고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게 참 그렇다. 나 또한 별 일이 없으면 두 아씨들과 함께 책을 읽곤 하는데 따로따로 책을 읽더라도 같은 공간 안에 있게 되면 무언가 서로 유대가 형성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큰 아씨가 전화를 하면서 다른 세계로 점프 아웃하면 그 유대는 자연 약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수다를 너무 떠느라 독서시간이 마구 줄고 있다. 서서히 사춘기 성향이 짙어지는 자식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부모 또한 그에 적응해야겠지만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는 조언이 필요하리라. 통화가 끝나길 기다려 나는 지난날 큰 아씨와 가졌던 대화를 상기시켜 주기로 한다.

어느날 큰 아씨가 투덜댄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맘대로 컴퓨터 게임할 수 있는데…”

우리집에서는 컴퓨터게임을  거의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TV도 별로 보지 않는다. 대신 그 시간동안 책을 읽거나 밖에서 놀거나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곤 한다. 나는 어릴적 습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아이들은 해버릇하던 것에 주력해 가는 성향이 있고 그것이 결국 나중의 삶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큰 아씨에게 이만큼 컸으니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크게 두가지 길이 있단다. 지금 현재 해야 할 일들을 제쳐두고 놀고 싶은 것을 마음껏 즐기며 사는 첫번째 길, 그리고 두번째는 비록 지금은 맘껏 놀지 못하고 힘들수도 있겠지만 그 나이에만 가능한 일들을 열심히 하는 길. 첫번째 길은 짧은 동안 현재를 즐기다가 대신 나중에 진짜 하고싶은 일이 생겼을 때 능력부족이어서 포기하거나 긴 세월동안 그냥저냥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길이 되겠지. 두번째 길은 길면 앞으로 10년에서 15,6년을 열심히 노력하는 댓가로 나중에 하고싶은 job을 가지고 재미나고 보람있게 살 수 있을 것 같고… 네 스스로 결정해. 엄마는 네 의견대로 따라줄게.”

큰 아씨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두번째 길을 택하겠다고 말했었다.

요즘엔 잔소리라 생각되면 표정이 약간 까칠해지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반항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모녀간 이야기가 마무리 될즈음 또 전화벨이 울린다.

“미안, 지금 막 슬립오버하고 온 길이라 오늘은 안되겠다...”

승낙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친구의 초대를 전하며 please, please를 외치는 대신 제 선에서 상황을 컨트롤한다. 아쭈, 제법인걸^^ 그렇게 날개를 제대로만 퍼덕여준다면 푸른 창공을 훨훨 나는 모습을 보는 일이 엄마로서 어찌 아니 기쁠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