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J가 결혼한다.

내 친구 J가 결혼식을 올린다. J는 결혼식 전 날, 만으로 마흔 하나가 된다. 빠른 친구들은 아이를 고등학교에 보내기도 하는 나이, 아무리 어거지를 써 보아도 피천득씨의 말처럼 곱다는 표현은 무리이고 곱게 늙는다는 칭송 정도나 들을 나이에 내 친구 J는 5월의 신부가 된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재혼이나 삼혼이 아닌 초혼이라 내가 이렇게 떠들어 댄다. 에라, 별 남자 있겠냐, 더 늦기 전에 적당한 상대 골라 나중에 억울하지나 않게 남들하는 것 해보자, 는 게 아니라 호들갑을 떤다. 게다가 신랑은 전도유망한 연하남이다. 그간 감추어 두고 몰래 익힐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랑이 이제 인내속에서 영글은 향기를 뿜으며 양가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J는 몇 해 전에 지금의 신랑과 미국에서 결혼했다. 시트콤 ‘프렌즈’에서 레이첼과 로스가 취중에 해치울 수 있었을만큼 초간단 형식으로 성혼이 이루어지는 라스베가스의 한 호텔성당에서 신부님의 주례로 둘만의 식을 올렸다. J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신랑집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뒤늦게 소식을 접한 나는 신랑의 못말릴 사랑이 느껴져 벅차게 축하해 주었다. 

“엄마가 날짜를 잡아주셨어. 결혼 해버리라는 엄마의 말씀을 들으니 그간에 얼마나 애닳아 하셨는지 실감이 나더라” 

그때 나이 서른 중반이었던 J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J는 후다닥 결혼을 하고 신랑의 사랑에 부대끼며 하루가 다르게 행복한 여인으로 탈바꿈해 갔다. 미소가 부드러워지고, 말마다 친근해 지고, 편지의 글들이 풍성해 졌다. 나는 J를 보면서 사랑에 빠지면 글도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를 모르는 사람도 연인을 위한 소네트를 쓰는가 보았다.

J가 지금의 신랑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아픔을 견디고 자신을 정진시킨 대가일 것이다. J에겐 과거,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이 있었고 그로인해 오랜시간동안 삶에서 남자란 존재를 가른 채 버텨왔다. 심약하고 마마보이인 못난 남자 대신 진정한 왕자를 맞으라는 신의 계시였던가 보다.

뒤늦게 진학한 학교에서 운명처럼 만난 훈남인 신랑은 J를 끔찍이 사랑한다. 신랑은 J를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다. 혼자 싹틔운 사랑을 J에게 전하기 위해 오랜동안 노심초사했단다. 어느날 J로부터 남자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근데… 연하야……” 

“연하? 그게 뭐 어때서, 몇 살 연한데?” “……” 

선뜻 말을 못하는 J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말해준다고 했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석연치 않은 태도를 보아하니 큰 인심을 써야 할 것 같아서 네살? 하고 물었다. 하지만 아차 싶었다. 고개를 젖는 J의 표정은 더 큰 인심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살? 다시한번 고개가 저어지는데 말문을 열지 못하는 나는 고타녀?(고리타분한 여자!)  J는 여덟살차이란 말과 한숨을 동시에 뱉어냈다.

“오. 마이. 갓!! J야, 너 대단하다!!”

신랑의 지략과 정성에 탄복한 사랑의 신 에로스가 그에게 화살을 건네준 건 야구장에서 였다. 신랑은 자신이 매우 꺼려하는 야구장에 J가 다른 학우들과 즐겨 간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후 꼬박꼬박 관전에 동반하면서 틈틈히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둘이 된 기회를 틈 타 J의 가슴에 화살을 박아버렸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었다. 나는 그저 재밌다고 웃었지만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한 내 남편은 동지애를 느낄만큼 감정이입이 되어 호쾌해 했다. 둘은 사랑하는 연상녀를 쟁취한 대한의 건아인 것이다. J의 신랑은 여덟살 터울의 세월을 요술처럼 오가며 오빠처럼 보살피고, 동생처럼 투정도 부리고, 꽃미남처럼 매력을 뿌려대는가 보았다. J의 이야기끝마다 묻어나오는 사랑이 예쁘기 그지 없다.

몇 달 전, 그런 아들의 깊은 사랑을 아시고 드디어 시댁에서 결혼을 허락하셨다. 한국에 나와 정식으로 만인에게 공표하는 식을 치루라는 엄명도 떨어졌다. 지금 J는 인생 최대의 행복을 만끽하며 뒤늦게 핀 어여쁜 꽃이 되어 해사하기 이를데 없다 (미국 동부와 서부에 사는 탓에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즈음 J의 웃음소리는 풀풀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녀의 웃음소리때문에 내가 행복하다.

J와 나는 같은 과였으면서도 여느 친구들처럼 서로 수다를 길게 떨고 어울려 쇼핑을 다니거나 술집을 전전했던 추억등은 별로 없다. 세네번의 여행, 몇 차례의 영화관람이나 콘서트에 다녀온 것만 언뜻 떠오를 만큼 말이다. 주구장창 붙어다닌 기억은 없지만 J는 언제나 내 곁에 있는 친구였다. J는 땡땡이 잘치던 내게 강의 노트를 빌려주고 때론 며칠에 걸쳐 조사해야 하는 숙제까지도 베끼게 해주었지만 오히려 내가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천사였다. 삶의 버거운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을 때, 함지기들을 맞았을 때, 신혼여행지로 출발할 때, 첫아이 돌잔치 때… 직장과 집이 대전에 있는데도 J는 언제나 서울 사는 내 옆에 있어 주었다. 평상시 연락이 잦은 편은 아니지만 내게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달려오는 친구. 이번에 뱃 속에 커다란 혹을 안고 고전할 때도 한의사로서 갖은 정성을 다해준 J.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신이 건강하고 여유로울 때 옆에서 같이 놀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해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 친구, 힘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 주는 진정한 친구는 그리 흔하지 않다. J같은 친구 말이다.

5월 말에 있는 J의 결혼식에 다녀오려한다. 서서히 호전되고는 있지만 발견 당시 너무 커있던 물혹이 일이주 내로 확연히 치료되지 않는다면 시간관계상 수술을 하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 역시 J의 추억속에 항상 곁에 있는 친구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