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마음만 합치면 기적을 이루어 내는 국민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읍시다. 평화와 번영과 도약의 새 역사를 만드는 이 위대한 도정에 모두 동참합시다. 항상 국민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날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민권 변호사의 마음을 담아, ‘3김’시절 이해타산을 물리치고 정권담합에 맞서는 용기를 담아, 진정한 민주주의의 열의를 담아 한 몸을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쓰셨습니다. 재임기간 5년동안 좌충우돌 대한민국은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퇴임 2년 후 이런 글을 접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입니다. 그 분은 이 유서를 작성한 후 1시간여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그 분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 아니 자다가 문득 깨어났는데 그 분 생각때문에 다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시절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서거가 뭐예요?”

엄마는

“왜?”

하셨습니다.

“라디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습니다, 했어요.”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송곡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앞으로 달려가셨습니다. 그때 막연히 슬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우리나라 대통령은 멋모르지만 훌륭한 존재이었겠지요. 지금은 조금 아는 어른이 되었고 저는 너무 슬픕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저같은 사람들에게 그 분은 영웅이셨습니다. 그 분은 가시는 순간까지 남들의 고통을 헤아립니다. 옥살이를 마다않던 변호사시절, 약하고 억울한 자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 듯이 마지막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통받는 타인을 염려합니다.

“나의 수족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아무 대책도 세워 줄 수가 없었습니다. 모진 사람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았습니다.”

자신의 측근들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때문에 괴로워하시던 심경을 여러번 토로하셨습니다. 처음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 분때문에 측근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야했을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런 세계가 정치판이었던가 봅니다. 그 분의 강점은 강점이었다가 약점이 되었습니다. 표적물이 된 것이지요. 청렴과 도덕을 추구하는 사람도 밥 먹고 볼 일 보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정치와 경제는 인연이 깊지요. 남한테 십만이 나오는데 그 분 한테서 백이 나왔으면 그정도면 청렴한 것입니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한 것은 그 분의 물이 터무니없이 맑았던 탓인가 봅니다.

상업고등학교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연수원을 수료한 후 판사를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약한 자를 위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나라를 위해 쓰다 가셨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 재산 없이 순수한 능력 하나만으로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신 분입니다. 그때 저는 대한민국, 내 조국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한 나라를 갈갈이 찢어놓는 오물같은 ‘연’ 없이도 모든 게 제자리에 설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구나! 뉴스마다 헐뜯고 싸우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과거의 유산이 되고 타산지석이 되어 보다 맑고 밝은 내 조국이 되려나 보구나!

하지만 섣부른 희망은 실망만 불러 오던가요? 외신에 오른 대한민국의 의사당내 당파싸움은 시정잡배들의 모습과 다름이 없으니 의아할 수 밖에요. “너희나라 정치인들은 원래 그렇게 싸우니?”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쉬 받는 질문입니다. 그저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어야 할 지 속마음 그대로 내놓고 울어야 할 지… 왜 내 조국은 자꾸 이렇게 혼동을 줄까요?

정권이 바뀌고 나면 국민들은 헛갈립니다. 지난 5년동안 살아온 사회는 온갖 비리와 부정으로 가득찬 세상이 됩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는 짜고 치는 고스톱같습니다. 내 편끼리 짜고 먹고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입니다. 그리고 그 판에 끼어있지 않으면 누구말이 옳은지도 모르고 휘둘립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는 모든 것이 올바른 세상이라고 믿고 살지요.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달라진 거라곤 정권 하나건만 바로 전 과거는 하루아침에 흙탕물에 젖은 낡은 운동화가 되어버립니다. 쓸모가 없어 버려야 하는 찢어진 운동화가 되어 버립니다. 벌써 몇 번째던가요? 제가 정치란 단어를 인식하면서부터이니 20년도 넘은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 강산은 두,세번도 바뀌었으나 이런 염증나는 전철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군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현 정부를 살아가는 민간인들은 청계천의 맑은 물이 실상은 박테리아와 페놀로 오염된 개천이라는 사실을 새정권이 들어서는 날 또 듣게 되는 겁니까? 이제 그만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짜고치는 고스톱,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을 들쑤시어 과장하는 일이기 보다 전 시대에 다져진 업적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를리 없으면서 우(愚)를 범하니 화가 나는 것이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기신 유서처럼 누구도 원망하지 맙시다. 하지만 언젠가 하신 말씀처럼 ‘열심히 싸우고, 허물고, 쌓아올리면서 긴 세월을 달려온 그 흔적…’은 추모하며 영구히 기립시다. 그리고 어떤 정권이 되었든 ‘실패의 기록’보다는 이루어 놓은 업적에 눈길을 주고 박수를 쳐줍시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성숙한 내 조국, 대한민국이기 위해……

마지막 가시는 길에 원하시던 담배 한 대라도 태우고 가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 생각이 더욱 가슴을 짓누릅니다.

당신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