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린 아린이

그림: 김유진

1. “엄마, 콘corn!”

아린이가 주문을 한다. 솥에 물을 담고 찜통기 위에 샛노란 옥수수를 넣는다. 아린이 별명은 ‘배고파 배불러’이다. 도대체 위가 얼마나 작은 건지 배고프다 해서 먹을 걸 주면 새모이만큼 먹고 금새 배부르다고 말한다. 그리곤 뒤돌아서기 무섭게 또 배고프다고 먹을 걸 달란다. 조금씩 먹어도 안 먹는 것 보담 낫고 안 먹어 속썩느니 귀찮더라도 챙겨주는 편이 낫겠지… 위안을 삼으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이 대단한 횟수의 반복이 이젠 꾀를 부른다. 손 닿기 쉬운 곳에 먹거리들을 놓아두고, 바나나나 우유로 배를 채우게 하고, 토스터에 빵 굽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이렇게 쿡cook을 해야 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다. 뭔 주문이 그리 많은지, 이런 애가 나중에 시집가서 임신하면 주변 사람을 얼마나 볶아댈까? 은근히 무서워진다. 자상하고 인내심 강한 사위로 잘 골라야지… 아린이는 지금 이어폰으로 언니의 아이팟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다리를 떨고 있다. 그러다가 책 하나를 집어든다. 꽤 두꺼운 챕터북이다. 페이지를 마구 넘기며 그림을 보기도 하고, 제가 아는 글자는 열심히 읽어 보는 듯 하더니만 곧 집어던진다. 아이팟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며 버튼을 누른다. “Kiss me through the phone, Kiss me…” 노래를 따라한다. 동요를 부르는 쪽에 훨씬 어울리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키스미 어쩌고 한다. 국어책 읽 듯 대사를 읊조리는 엉성한 배우같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린다. 아린이는 엄마를 귀찮게 하는 댓가를 늘 이런 식으로 치루고 있다. 참말, 애 땜에 웃고 산다더니…

2. “엄마, 이거 카피해 주세요.”

아린이가 B5 사이즈 프린트 종이를 내민다.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무얼 카피하겠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뭘 카피해달라는 거니?”

“이거, 이 페이퍼…”

“이 종이?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데?”

“I Know. 이 페이퍼 필요해. 근데 페이퍼 아껴쓰라고 했잖아? 트리tree 안 죽일라면… 그러니까 이 페이퍼 카피해서 쓰면 되잖아, right, mom?”

옆에는 눈이 동그란 폴리나가 아린이가 건네준 종이 한 장을 들고 심각한 눈빛으로 나무를 살리기 위한 자기네들 묘책에 동조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구, 이 천사들!! 폴리나가 있어서 그러진 못했지만 뽀뽀 100번 감이다. 그런데 이 천사들도 6년만 지나면 슬글슬금 여드름 솟은 얼굴로 엄마들 말에 토를 달면서 제 하고픈 대로만 하려 들겠지? 뺀질뺀질 말 안들어가면서…?

몇 달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생 최대의 실수는 두 아이를 6년 터울로 낳은 것이라 말하곤 했다. 출산 후 빠진 귀밑머리가 슬슬 돋아날 즈음이 둘째를 갖기에 적당한 시기라시던 이웃집 아주머니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거였는데… 정말 되돌이킬 수만 있다면 바로 연년생으로 뽑아버리고 일찌감치부터 내 인생 맘껏 누리며 사는 건데… 라고 말이다. 그런데 강집사님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하나님은 자녀들도 딱 그 가정에 맞게 내려주셔요. 각 가정마다 사정이 다 다르잖아요? 그 사정에 맞춰서 제일 잘 감당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도록 조절해 주신 거랍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셨다는 말을 믿었다기 보다 그런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시는 강집사님의 태도에 감동을 먹었을 것이다. 그 후로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정말 아린이가 늦게 태어나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기쁨을 어찌 누릴 수 있겠는가? 아린이는 딱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에 우리 곁에 와주어서 사랑도 주고 행복도 주는 구원의 자녀이다.^^

3. “엄마, 친구들이 아무도 날 픽pick 안 해!”

아린이가 투덜댄다.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온다. 그래서 집에서 손 번쩍 드는 연습도 했었다. 연습한 다음날, “엄마, 오늘 나 픽해서 말했다!” 만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그득했다. “거봐, 손 그렇게 드니까 뽑아주지?” 우린 같이 좋아서 웃었다. 학교생활도 처음이고 영어도 어눌한 아린이같은 아이들이 이미 모든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과 같은 궤도에 오르려면 2,3년은 걸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학교에 가 보면 아린이는 슬금슬금 손을 어깨만큼만 올리곤 하길래 머리 위로 힘차게 뻗어 올리는 연습을 했고 그래서 문제가 해결된 줄 알고 있었다.

아린이 반에는 매일 돌아가며 VIP가 있고 그 아이는 언제나 먼저 발표할 기회를 가진다. 기껏해야 N이 들어 있는 글자가 어디 있느냐? 점프 해봐라, 위글(wiggle) 해봐라… 와같은 작은 주문이지만 아이들에게는 필사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이벤트 시간이다. 그런데 원칙이 있다. 연속적으로 남자애는 여자애를 또 그 여자애는 다른 남자애를 지목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아이들은 손 든 친구들 중에 아무나 눈에 띄는 아이를 선택하는 듯 했다. 그러던 것이 차츰 고착화되어 이젠 마치 짝꿍놀이처럼 늘상 같은 아이들이 지목되는가 보았다. 다시 말하자면 아린이에게는 그 남자 짝꿍이 없는 것이다.

“그럼 예찬이한테 말해봐. 너 좀 픽해 달라고.” 예찬이는 같은 반 유일한 한국 남자친구이다. “예찬이는 브룩만 픽해.” “그래? 예찬이가 브룩 좋아해?” 그러자 아린이가 능글맞게 웃는다. 예찬이 녀석, 눈이 높은 걸… 사실 내 눈에도 그 반에서 브룩이 젤 예뻐 보이긴 했다. 그럼 어쩐다…? “그럼 너도 보이boy들하고도 좀 놀아. 맨날 걸girl들하고만 노니까 그렇잖아.” 유독 남자애들하고 노는 걸 반겨하지 않기는 하지만 단지 그 이유때문이랴,라고 생각한 순간 “다른 애들도 같이 안 놀아.”라고 아린이가 말한다. 즉 예찬이가 브룩이랑 놀기때문에 지목하는 건 아니란 뜻이다. 나도 뭘 어찌해야 좋을 지 몰라 “그럼 어쩌지…?” 한다. “그럼, 폴리나 VIP때 보이 말고 나 픽하라고 할까? VIP는 아무나 픽할 수 있거든…” 나름 해결책을 강구한다. “그래라. good idea인걸!” 다행히 그런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안 돼도 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암튼 엄마로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그간 소홀히 해왔던 아린이의 외양을 조금 신경 써 주는 것 정도일라나? (우습지만 보이들은 외모지향주의니까…) 옷도 핀도 거의 제 언니나 남의 언니 것을 물려받아 쓰는 아린이. 언니는 프리케이 졸업식 때, 인기상이랑 베스트 드레스상을 받았건만, 둘째라 대충대충 키우는 것이 이런데서 드러나는 것 같다.

“아린아, 그렇지만 엄마는 네게 미안하지는 않아. 엄마랑 아빠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아마 아린이 동생이 태어난다면 그 아기는 빵구난 옷을 입고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닐지도 몰라. 그치만 너처럼 언제나 까르륵 거리며 웃기는 할거야. 사랑은 물질도 아니고 욕망도 아니고 허영도 아닌 마음으로만 채워지는 보물창고란다. 엄마가 너무 미숙한 사람이라 살아가면서 뒤늦게 깨달아지는 것이 많구나. 한 때는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주지 못해서 네게 미안한 마음을 품기도 했단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너는 보물이 그득그득 넘쳐나는 창고란다, 너무나 빛나서 눈이 부셔, 고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