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술

리커스토어를 보면 술 생각이 나야하는데 아버지 생각이 난다. 술냄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 가령 수영장이나 중학교 교정같은데서 생뚱맞게 시금털털한 알코올 향취가 떠오르는 것도 아버지 때문이다.

오래된 추억이 있는데, 식구들과 잠시 떨어져 고모와 살았을 때, 아버지가 출장 온김에 나를 만나러 학교에 들른 적이 있었다. 수업중에 담임선생님이 불러 나갔더니 내 팔짱을 끼고 등나무까지 걷자며 깜짝쇼를 벌이었다. 벤치에는 양복 입은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때서야 선생님은 아버지가 참 좋은 분이시던걸,하며 내 팔을 풀었다. 아버지와 마주하는 순간 보라색 등꽃이 만발한 여학교 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버지 체취가 코 속으로 스며들었다. 전날 음주문화의 여취(남은 향)거나 혹은 해장술에서 아버지의 사람됨을 식별해 내다니, 선생님도 술과 인연이 깊구나, 생각했었다.

어렸을 때, 술에 대한 상식이 깊었다. 중국식당에서는 빼갈, 제삿상에는 따끈하게 데운 정종, 일식집에 가면 사케를 주문하고, 우리집 식탁에는 금복주가 올라오곤 했다. 손님이 오면 장식장에서 나폴레온, 조니워커, 꼬냑, 시바쓰리갈 등을 꺼내 온더락으로 준비 했다. 엄마가 매콤한 닭볶음이나 싱싱한 오징어를 상추, 쑥갓과 함께 초고추장에 묻혀내면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쨍,하고 맑은 유리잔 소리를 냈다. 친할아버지가 오시면 안주가 풍성해졌다. 싱싱한 굴, 꼬막무침, 돼지보쌈, 굴비찜… 아버지는 주로 저녁에만 술을 마시는데 할아버지는 매끼마다 반주를 걸치셨다. 어느날, 운전을 해야하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반주 한 잔을 권하시자 엄마가 허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도 참, 이이 운전해야 해요.”

아버지는 사람들이 선물로 술을 줄 때 제일 행복해 했다. 처음으로 면세점에서 무언가를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엄마가 양주를 사오면 어떻겠냐고 해서 멋진 술병이 그려진 하얀 비닐가방을 양 손에 들고 공항게이트를 나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본 딸보다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하얀색 비닐가방때문에 휘파람을 불었다.

아버지와 술이 서로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드물었다. 아주 익숙해진 부부처럼 사이가 좋았다. 즉 술로 인해 병 난 일도 없었고 술주정 소리도 거의 듣지 못했다. 아버지는 한국경찰들의 음주측정 기준이 터무니없이 원시적이라고 비난함으로써 당신의 센 주량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른데 혈중 알코올 농도가 무슨 잣대가 될 수 있냐는 말은 나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끝까지 외국에서처럼 바닥에 선을 긋고 그 위를 당당하게 걷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어했다.

어느날 아버지가 한 달이 넘게 금주한다는 놀라운 뉴스를 접했다. 이후로도 가끔씩 아버지는 단기 금주에 돌입하곤 했다. 그때마다 마음이 설레였던 이유는 아마도 무의식중에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란 생각을 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루도 술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알코올 중독자라면 아버지는 조금 다른 사람이란 사실이 기뻤다. 술을 아버지 몸에 박힌 점처럼 그렇게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언제부터 술과 사랑에 빠진 걸까, 궁금해 졌다.

“어렸을 적,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에 배고프면 막걸리 찌께미를 얻어 먹곤 했었지. 그게 밥풀이라 배도 채우고, 먹고나면 얼얼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자꾸 빠치게 되더구나. 조금 커서는 막걸리를 음료 대신 마시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의 애지중지하는 약주를 한바탕 훔쳐 마시다 들킨 것처럼 당혹스럽게 속이 울렁거렸다. 아버지에 관해 알지도 못하고 오해를 하다니… 아버지에게 술은 기호품이 아닌 생필품이었단다. 어렸을 적 먹어 버릇하던 것을 커서 즐긴다는 사실이, 그게 우유라면 더 좋겠지만 술이라고 해서 이해 못할 일은 없었다. 그때부터 술안주를 챙기는 엄마가 좋은 아내로 보였다.

나도 엄마 닮아 술 못하고, 남편이 술과 담배를 안하는 사람이라 엄마는 좋아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사위랑 대적할 멋이 없어 아버지가 많이 서운했으리란 생각을 하면 괜히 죄송스럽다. 아버지한테 딸이 또하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바로 이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