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떠났다!  [2편]

(4일째편)

할 일이 많았다. 몸이 아파서 모든 게 귀찮았을 때 내버려 두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집 안을 골고루 돌아다니며 이 것 저 것 손을 대었다. 사실은 글도 좀 쓰고 싶고 운동도 해야하는데…, 김치도 담가야하고 점심도 챙겨 먹어야하고 빨래도 해야하고 저녁쌀도 씻어야 하다니… 아이들 있을 때와 별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이 없으면 온통 내 세상이 될 줄 알았다. 책 실컷 읽고, 엉덩이 배겨서 일어나고 싶을만큼 한 자리에 앉아서 자판 두들기고, 옷을 센스있게 차려입고 도서관에 가서 내 몸 이외에는 신경쓸 것 없는 노처녀 행세를 해야지, 했다.

비가 주룩주룩 천둥까지 데리고 와서 나를 집 안에 가두어 놓았다고 하자. 여전히 원한다면 old bachelorette놀이쯤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샤워를 하고 향수를 뿌리고 우아하게 앉아서 차를 홀짝거리며 책 페이지도 살짝살짝 교양있게 넘기는 놀이… 언제나 이 일 저일 하는 틈바구니에 몸도 쉬일겸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읽다만 페이지를 찾았는가 싶으면 조금있다 그 갈피 채 얼굴에 덮고 코를 고는 아줌마식 독서법 말고… 그런데 13년동안 몸에 베인 주부의 궤적을 한순간에 거스른다는 것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서 마늘까서 생강하고 양파하고 갈아 고춧가루에 버무려야지. 참참 찹쌀죽 쑨 건 냉장고에 있어… 라고 내 안의 어떤 조직인가가 소리치고 있다. 주말에 오시는 손님께 대접할 거라곤 아무것도 없잖아! 밑반찬도 만들고 먼지도 털어내고…

알았어. 알았다구. 딱 거기까지다. 다음주부터는 어림도 없어. 나는 완벽하게 노처녀 백수 역할을 소화해 낼거야. 아무도 말리지마!

(9일째편)

하늘에 변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독립기념일 연휴만 반짝하더니 오늘 다시 천둥을 동반한 비가 국수가닥처럼 쏟아진다. 7월이라는데 외출할 때면 언제나 얇은 자켓을 두르고 다닌다.

남편은 역시 남자고 남자들은 동물이다. 아이들이 없는 동안을 틈 타 어찌나 성인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지… 아이들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추억하면서도 없는 동안의 자유를 몹씨도 만끽하고 싶어한다. 역시 남자들은 단순하고 유치하고 육체적이다. 신혼 때는 부끄러움도 있었고 체면도 차렸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니 자유가 물란하다. 그런데 뭐 나도 싫지만은 않다. 싸울 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하니까. 아이들이 없으니 싸울 일이 없다. 그러고보면 부부간엔 아이들때문에 싸우게 되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아이들 문제로 의견차이가 있어서 논쟁을 하는, 뭐 그런 바람직한 시츄에이션이 아니라 그냥 몸이 피곤하니 그것이 짜증으로 이어지는 1차원식 말이다. 둘이서 풍광 좋은 곳에 가서는 다음에 아이들 데리고 다시 와야겠다, 하면서도 13년만의 호젓함을 노골적으로 즐기는 마음이 그득하다. 아이들이 많은 경험을 하고 부쩍 커져오기를 바라는 동안 엄마아빠는 세월을 거슬러 살고 있다니… 조금 겸연쩍은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성숙한 성인으로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들은 동화속 원더랜드에서 살아간다. 단지, 환상의 동화가 아니라 현실의 동화라서 유감이다. 환상의 동화속이라면 마냥 평화롭고 천진스럽겠지만, 현실의 동화세상에서는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떼쓰면 달래다가 지쳐 쓰러진다. 모든 것이 아이들 위주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가고 싶고, 보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을 함께하느라 시간이 흐른다. Adult only급 영화 보러 극장에 가는 건 꿈도 못 꾸고, 고춧가루 조금 더 넣으면 칼칼한 경지에 이르는데 밍밍한 맛에서 그쳐야 하고, 운전이 지긋지긋한데 왕복 1시간 20분 라이드해서 차 안에서 끝날때까지 30분 기다리고… 그렇게 키운 아이가 성인의 나이가 되면 그때 부모는 노년으로 접어든다. 오! 너무 인생이 짧아…

그러니 틈틈이 기회가 생기면 알뜰하게 성숙한 여자, 혹은 남자로서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며칠째??

한국에 폭우가 내려 많은 수해가 생겼다. 수확을 앞 둔 메론밭 주인이 울었다. 축대가 무너져 집이 부서졌는데 인명피해는 없어 감사하다는 장한 할아버지도 있었다. 강풍이 분 지역이 있어 수 십 가구의 베란다 유리창이 깨어지고 골프장에서 철근이 휘어졌다. 하루아침의 변괴. 뉴스를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마음이 무거워서 거듭거듭 한숨이 올라왔다. 한국 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밤샘 대치를 위해 그날 밤, 메트리스와 담요를 의사당내로 들여 놓았다는 뉴스가 뒷소식으로 전해졌다. 거대 언론사들의 방송국지분 소유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다. 혀 밑에서 담즙이라도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입 안이 쓰다. 내 보기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현안을 두고 정력을 푸지게도 낭비한다. 의견이 다르면 절충안을 모색해야하는데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바람이여, 애매한 집의 유리창을 깨지말고 그 사람들을 날려보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