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Yoojin Kim

아이들이 돌아왔다! (2)

에피소드1.

“이게 무슨 소리야?” 남편한테 묻는다.

“밖에서 나는 소린 것 같은데…” “그런가?”

영어로 말하는 소리이니 그럴밖에,라고 생각하고 피곤한 몸을 그대로 뉘였다. 하지만 다른건 몰라도 오감 하나는 확실히 발달한 나의 레이다망에 자꾸 소리가 걸려든다. 거실쪽인걸… 참, 어제 아이들이 돌아왔지.

아무래도 TV소리 같다고 내가 말했고 남편은 “설마”라고 대꾸했다.

이불을 박차고 튀쳐나가보니 내 짐작이 맞았다. 어라, 이애들이? 사전 양해없이 TV를 맘대로 보고있다니… 우리집엔 케이블도 안 나올뿐더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TV를 켜는 일은 지금껏 전무(全無)했었다. 심심해서 몸을 비비 꼬아댈 때조차 TV는 염두에 두지 않던 아이들이었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안 하던 버릇이라 이상할밖에… 오죽하면 남편이 설마,라고 했을까. 일어나자마자 무슨 TV냐고 묻자, 새삼스레 별 참견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두 녀석 다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차차!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에피소드 2.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수저를 놓는 아이들. 접시엔 먹다만 음식들이 가득하다.

“아직, 많이 남았잖아”라고 말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배불러요” 한다. 처음부터 덜고 먹던지… 슬슬 눈치보며 엄마아빠 입에서 또 굶주리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올까, 지레 식상한 표정을 짓는다. 한두번도 아니고 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 반복해야 하는 우리가 더 힘들다는 사실을 알까 모를까? ‘아이고’ 내 입에서 한숨이 터진다.

에피소드 3.

작은 녀석이 어리광에 떼를 부려댄다. 양치하고 발씻는 일조차 칭얼대며 혼자 하려하지 않고 말투는 세살박이 말하듯 하고 있다. 생전 안 하던 엄마 때리기를 해서 어찌나 놀랐는지… 밥은 남기면서 이것 저것 먹고 싶다고 요구가 산더미같고 이녀석,하며 엄한 표정을 지으면 온 인상을 구기면서 울기 시작한다.

큰 녀석은 틈만 나면 컴퓨터 앞을 기웃거린다. 오자마자 도서관에서 수 권의 책들을 대출해 왔건만 책은 조금 읽다가 옆에 모셔두고 벌러덩 드러누워 허공을 응시한다. 어딘가 조금 상처가 생기면 엄살을 부리고, 쇼핑은 왜그리 밝혀 대는지…

“너희들, 이리와. 다 같이 책 읽자!” 했건만 멀뚱멀뚱 딴 짓들이다. 놀라워라! 한 달반이란 짧은 시간동안에 집에서 수년간 익혀온 생활의 규칙이 싹 흐트러져 버리다니… 생리전 증후군처럼 암담하고 비관적인 생각이 나를 덮쳤다. 기운이 쑤욱 빠졌다.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아?

미국사는 한국 아이들에게 가장 큰 장벽이 영어라 나는 그토록 책읽기교육에 열정을 쏟았었다. 이 곳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는 영어일 뿐 아니라 에세이 쓰는 능력이 학습 능력과 직결되니 많이 읽고 쓰는 일은 빅딜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공부를 잘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아이에게 끼가 있다면 연예인이 되어도 좋고 수영을 잘하면 싱크로나이즈드 선수가 되어도 좋고 스케이트를 잘 타면 피겨선수가 되어도 좋겠지만 지금껏 지켜본 바로 이렇다하게 특출난 재주가 없으니 미래가 불투명한 느낌이 들었다. 박사가 넘쳐나는 시대지만 공부라도 장려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큰 애 어렸을 때, 갈 곳도 없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도서관에 가서 아구가 아프도록 책을 읽어주었다. 덕분에 수도없이 눈도장을 찍게 된 사서가 자진해서 마감된 이벤트에 슬쩍 끼어줄만큼 친밀하게 대했다. 미국에도 이런 일이 있구나, 사람사는 동네는 다 마찬가지란 생각을 했었다. 덕분일까, 큰 아이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둘째로 말하면 제 언니 때보다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책을 무엇보듯 등한시 하지는 않았건만…

아이들이 돌아올 때, 인터넷으로 주문한 꽤 많은 양의 책을 들고 오게 했다. 두가지 효과를 노렸다. 하나는, 엄마가 솔선해서 책을 밝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무겁지만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성취감을 느껴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가 할머니들이 애들 힘들게… 라며 엄마 책망만 하셨으니 손발이 맞지 않아 결국 무거운 짐으로 전락해 버린 책들… 할머니들의 해일같은 사랑으로 아이들 몸에서 풍만한 빛이 뿜어져 나오긴 하지만 해일때문에 둥둥 떠내려간 기둥을 다시 건져 올릴 일로 난감해 졌다. 너무 호강만 하고 온 아이들이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변해 온 모습을 보고 아차차, 한다.

책보다는 TV가 재밌을 테지. 음식이 넘쳐나는데 싹싹 긁어먹을 필요성이 있겠나? 부모품에 있을 때가 아니면 철없는 공주님처럼 굴지도 못할터이니… 그래, 그럼 그렇게 살아라! 단, 나는 엄마로서 자식을 그런식으로 키우진 못하겠다. 좋은 말로 하려했건만 아니 되겠다. 스파르타식 출동! 떼를 쓰거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 책읽기 놀이. 나 한페이지, 아이 한 페이지 읽기 놀이다. 맛있는 디저트를 준비하고, 접시에 있는 모든 음식을 비웠을 때만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준다. 매일 해야할 일(악기연습과 work book한 페이지)을 끝마쳤을 때 친구와 놀 수 있다. 용돈 안에서 쇼핑을 한다. 주어진 가사일을 돕는다…

이런 일들이 잔소리없이 잘 돌아가는 우리 집이 될 때까지, 아이들 스스로 잘 굴러가는 그날을 향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 (아휴,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