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늘~

1.    more than expected (I)

아비게일을 공항에서 픽업했다는 전화는  나흘 전 오후 세시경에 받았다. 언제 보겠냐는 형인의 물음에 정확한 기약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당시 발등에 떨어진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랐기 때문이다. 고작 빠른시간 안에 자리를 만들어 보기로 제안한 것이 최선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진심어린 말투로, 오랜 친구를 만나서 정말 반갑겠다. 성심껏 잘 해 줘라,는 인사치례를 끝낸 후, 난 슬몃 형인의 그녀에 대한 첫 인상을 물었다. 그는 주저않고 ‘more than expected’라고 말했다. 

2.    발칙한 아비게일

“선영, 인사해. 이 쪽은 내가 말했던 아비게일”

‘제 2의 제니퍼 로페즈를 꿈꾸는 아비게일…’ 나는 H백화점 정문을 서둘러 빠져나오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사람들이 툭툭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그들은 내 이마로부터 3,40도 위쪽을 향해 시선을 두느라 나와 어깨를 부딪힌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키도 큰 아비게일.

“뭐라고?”

형인은 반문했지만 내 중얼거림을 꼭 다시 듣겠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세일기간에 백화점 정문에서 만나자고 한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벌떼처럼 지지(zz)대는 사람들 틈을 겨우 빠져나온 후 아비게일을 향해 돌아서 손을 내민다.

“Hi, I’m Sunyoung. Nice to meet you”

그녀는 손을 내미는 대신 내 양쪽 어깨를 부여잡고 재빠르게 몸을 밀착시켜왔다. 봉긋한 유방이 내 쇠골뼈 언저리에 닿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내 양쪽 볼에 쪽쪽, 키스를 하더니 올라 꼬모스타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비게일이 뿔께(pulque)란 술을 선물했어. 집에 가자.”

형인의 양 손엔 백화점 로고가 커다랗게 새겨진 쇼핑백이 세개쯤 들려 있다.

“뿔께?”

“도수 낮은 멕시코 민속주래. 마괴이라는 용설란과 추출물을 발효시킨건데, 요즘은 멕시코에서도 흔히 마시는 술은 아닌가 보더라구. 말하자면 우리의 막걸리와 비교할 수 있겠네. 여자친구가 술을 좋아한댔더니 선물로 사온거래.”

“기왕이면 데킬라를 사오지…”

“역시 술꾼다운 발언이야.”

형인의 농담에 아무렇지 않은 듯 킥킥댔지만 내 가슴에선 아까부터 작은 파문이 연속적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아비게일의 피부는 여름햇발에 잘 영근 청정풋고추처럼 윤기가 흐르고 탱탱했으며 실핏줄이 다 드러나도록 투명했다. 형인의 기대치를 웃돌만큼, 내 가슴에 파문을 던질만큼 그녀는 눈부셨다. 우리의 대화를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아비게일이 고운 이를 드러내고 해맑게 웃는다. 하지만 순간 내 머리를 강타하는 단어는 고작 ‘발칙하다’는 그림씨였다.

우리는 마켓에 들러 아비게일이 지목하는 안주 몇 가지를 사들고 형인의 아파트를 향했다. 마켓에서 그녀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여러 사람들을 향해 그녀는 ‘올라(안녕)’를 연발해 댔다.

“한국에 왔으면 안녕,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올라라니, 어디로 오르란 말야?”

난 농담조를 가장해 노골적으로 아비게일에 대한 적대감을 노출시켰다. 질투를 컨트롤하지 못할만큼 이성은 근간을 잃고 흔들림을 멈추지 않는다.

세 개의 쇼핑백과 세 개의 비닐봉지를 들고 철거덕거리며 걷는 형인에게 다가간 아비게일은 마다하는 그로부터 한 개의 쇼핑백과 두 개의 비닐봉지를 뺏다시피 나눠들고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앞서 걷는다. 싸가지 있는 아비게일. 뒷태마저 쭉쭉빵빵한 아비게일. 다리가 상체 길이의 두배는 돼 보인다. 스키니 진에 허리가 다 드러나는 연두색 탱크탑을 입고 있다. 옷은 입었으나 벗은 몸매를 대면한 듯 민망하다. 시선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심리적 갈등과는 상관없이 두 눈이 그녀의 엉덩이를 정확히 조준한다. 여덟팔자로 벌어진 둔부근육 때문에 사타구니와 허벅지 경계부분에 다이아몬드형 틈이 보인다. 지독한 지지배로군. 칼로리가 철저히 계산된 식단을 앞에 두고 앉아 깨작깨작 젓가락질, 아니 포크질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발칙한 지지배야. 아비게일에 대한 변함없는 인상이었다.

형인의65평 아파트는 17층에 위치했다. 그가 이 집으로 이사온 후부터 우리는 남산이나 북악스카이웨이로 야경을 위한 드라이브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내가 제일 흐뭇해 하는 부분이다. 초현대식 외형과는 반대로 형인의 집 실내는 갈색과 미색톤의 앤틱풍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의 침실엔 빅토리아풍의 케노피가 쳐져있는데 실제로 빅토리아 왕비가 자러 와도 전혀 누추하지 않을 정도로 근사하다. 방은 다섯 개지만 나머지 세 개는 모두 작업실로 쓰고 있으므로 문간방 하나 정도가 비어있었다. 그 방에, 처음보는 바퀴달린 철제 프레임 위에 하얀색 린넨으로 덮인 싱글 메트리스가 놓여 있다. 아비게일…… 발칙한 계집애, 난 속으로 스무번도 넘게 그렇게 욕을 해댔다. 갑자기 둘의 인연보다 나와 형인이 알고 지낸 시간이 짧다는 사실에 심통이 팔딱거린다. 스페니쉬를 제 2외국어로 선택했던 형인은 우연찮게 잡지에서 읽은 아비게일의 기사를 접하면서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고 답장을 받으면서 둘의 연이 이어졌다고 했다. 그 때 아비게일은 중학교 1학년. 아비게일이 형인보다 다섯살 연하니까 나와는 여섯살 차이가 나는 셈이다. 내 나이 스물 아홉, 그러니까 아비게일은 스물 셋. 서른 셋의 원숙미는 지(知)각으로 드러나고 마흔 셋의 중후함은 시각으로 인정되고 쉰 셋의 성공은 청각으로 확인되고 예순 셋의 퇴화는 후각으로 퍼지는 것처럼… …  촉각이 눈치 채는 나이이다, 스물 셋의 탱탱함!   아비게일은 스물셋, 나는 스물 아홉. 숫자가 상징하는 수많은 수식어가 대조적으로 연상작용을 일으키자 내 속에선 발칙한… 이란 소리가 바운싱을 계속하는 공처럼 튕김을 멈추지 않는다.

형인은 두개의 쇼핑백을 아비게일에게 넘기고 두 개의 비닐봉지를 건네 받는다. 세 개의 쇼핑백은 싱글메트리스가 놓여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세 개의 비닐봉지는 형인의 오펠로식탁 위에 올려진다. 무지개떡, 잡채, 순대, 떡볶이, 녹두전이 형인의 자랑거리인 앤틱 식탁 위에 올려지자 형인은 장식장에서 미색 호리병을 꺼내 들고 온다. 꾼답지 않게 내 신경은 술병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문간방으로 들어간 쇼핑백에 머물러 있었다. 게다가 그곳엔 침대가 놓여있지 않은가. 당분간 형인의 아파트에서 기거할 것이란 소리를 들었음에도 새로 들여온 메트리스는 세 개의 쇼핑백과 엉켜 내 기분을 몹시 꿀꿀하게 만들었다.

형인은 술잔 대신 사발을 내놓는다. 

“자, 민속주는 민속주답게 사발로… … .”

형인은 연신 싱글싱글, 사발에 뿔께란 술을 반쯤 채운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거야. 첫 판에선 노우 원샷, 오케이?”

형인은 의미없는 잔소리까지 늘어놓으며 내 신경을 긁는다. 나는 두 사람의 ‘치어스’ 소리를 안주삼아 사발을 순식간에 들이킨다.

“어어, 반칙인걸. 원샷 안하기로 하고서는…”

“안한다는 소리 안했는데… 근데 이거 넘 쓴거 아냐? 뭔 술맛이… … 이다지도 껄끄럽냐?”

난 미간을 찌뿌리면서까지 술에 대해 못마땅하다는 표현을 과장하고 있다. 아비게일은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았고, 풍성한 안주거리를 덥석덥석 입에 밀어넣으며 음, 음, 소리를 내고 있다.

‘뭐야, 깨작깨작이 아니잖아!’

나는 뜨악한 표정을 드러내며 아비게일을 쳐다본다.

‘하지만 누가 아는가? 내숭일지도…’

형인은 그녀쪽으로 어깨를 기울이며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해댔고, 그녀 또한 본토발음으로 따다다 거리길 계속했다. 둘이 그러든지 말든지 치기마저 오른 나는 용설란과 그 앞에서 팔짱끼고 폼재고 있는 밀집모자 사내를 노려보며 사발에서 뿔껜지 뭔지 하는 술이 넘실대도록 병주둥이를 기울였다. 나의 심기를 진정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뚜욱, 시치미를 떼는 건지 형인은 아비게일의 따다다, 소리에 계속 응대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오래된 연인이여. 나는 하마터면, 사발에 담긴 뿌연 액체를 둘에게 뿌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수족증걸린 사람마냥 술을 질질질 쏟을 뻔 했다. 세번째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부터는 정신이 혼미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무항체성 면역결핍처럼 저 북미 어딘가에서 날라온 정체 모를 술때문에 내 주량과 주도(酒度)는 한 순간에 평정이 깨져버린 것이 틀림없다.

“어이, 발칙한 멕시코 아가씨.”

내 귀에 이해가능한 언어가, 비록 내 입에서 나왔지만, 들리자 숨통이 트이는지 꺼어억하고 긴 트림이 터졌다.

“여긴 한국이거든? 한국엔 한국말 있거든? 한국에선 한국말 쓰는 거거든?”

순간, 혀끝에 모다둔 불순물을 내뱉은 듯 가슴이 시원해져서 스르륵 잠이 쏟아졌다. 먼곳으로부터 땡땡, 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