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배우로 '추적 60분'을 찍으며...

남편이 말했다.

“이거 세차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한국에 전화해야 겠는걸, 내 차 TV에 나온다고…”

아이고 뜬금없어라…… 남편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다. 그렇다, KBS 추적 60분 팀은 구형 코롤라의 달리는 모습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긁히고 브레이크 페달 밟을 때마다 삐삑 소리나고, 달릴 때 덜덜덜 머플러 터진 듯한 소음때문에 라디오라도 들을라치면 볼륨을 최대로 올려야 하는 ‘중고 코롤라’ 가진게 뭐 자랑이라고…… 그치만 아내인 나는 안다. 유치빵빵한 농담 안에 들어찬 내 남편의 선량한 기쁨, 작은 보탬이 되는 인간적인 흥분…

노랑님 덕분에 졸지에 낡은 코롤라는 메스컴을 타게 되었다. 노랑님의 사연을 담으러 KBS 취재팀이 왔고 미씨 칼럼의 이웃이며 같은 MA주민이란 인연으로 나는 이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얼굴이 공개되지 않을 거란 말을 몇차례 확인했지만 가봐야 알리란 생각은 들었다. 처녀시절, 몸담았던 TV광고프로덕션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일지도… 창작은 모방의 새끼(모방은 창작의 어머니의 패러디^^), 현장에서 필요하면 구하라, 카메라와 조명으로 사실을 은폐하다, 편집과 CG로 눈속임을… etc.

아니나 다를까,

“손하고 발을 살짝살짝 찍고 얼굴은 윤곽정도만 드러날 거예요.”

라는 멘트가 날아온다. 어쩌겠는가, 방송현장의 유연성인 것을… 카메라 맨이 조수석에 앉아 파인더를 들이대고 뒷좌석에는 감수하듯 담당 PD가 앉았다. 미국에 온지 9년. 그간 통 연락 못하고 지내는 오래된 지인들 사이에

‘연아, 팍 삭아서 대역배우 하더’란 이야기가 떠돌게 생겼어도

“운전 정도야 별거 아닌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라며 개스를 만땅으로 채워놓은 남편의 정이 더 좋았다. 까짓, 머. 얼굴이 나오든, 김치 담가먹느라 망가진 손등이 나오든 찍어야 한다면 찍혀야지 머^^ 중요한 건 거짓은 물리쳐야 한다,는 노랑님의 철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는 사실이거던! 나도 거짓말쟁이, 허풍쟁이, 인지상정이 결핍된 이기주의자들을 끔찍이 싫어한다!

낡은 코롤라는 열심히 달렸다. 1차선으로 가라면 1차선으로, 중앙 차선에서 스피드를 내라면 더욱 빠르게… 그러는 동안 뒤에 앉은 담당 PD님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MA주는 살기가 어떤가요? 겨울엔 한국보다 춥나요? 큰 애가 11살이면 몇 학년이지요? 나는 엑셀을 밟고 사이드 미러를 보고 차선을 바꾸면서 열심히 대답했다. 여러 각도에서 찍어야 하는 사정때문에 휴계소에 들러 그들은 회의를 하고 카메라맨이 다른 차에 옮겨타고… 또 달리기 시작하면서 PD님이 묻는다. 겨울엔 한국보다 춥나요? 그럼요… 큰 애가 11살이면 몇 학년이지요? 허걱! 아까 다 물어보셨잖아요!! 제가요? ㅋㅋ 눈치라면 한가닥하는 나는 깨달았다. 사고 직전, 아이들과 드라이브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행복한 노랑님의 모습이 필요해 끊임없이 질문을 생각해야 했던 PD님! 어차피 말을 해야하므로 이번엔 내 쪽에서 질문보따리를 풀어버렸다.

“추적 60분이란 프로는 하시기 어떠세요?”

“싸워야 하는 프로라 힘들어요. 제보를 받은 한쪽편에 서서 상대편과 싸워야 하니까 신경이 많이 쓰이죠. 요즘은 공평성때문에 한쪽 입장만 방송해서는 안되거든요. 상대편과도 인터뷰 해야하는데 응해주지 않아서 힘들고요.”

“그럼 어떻게 하세요?”

“적어도 contact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라도 담아서 내보내죠…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방어를 해야하니까.”

“제보를 받으면 사건에 대해 검증을 한 후 촬영에 들어가나요?”

“물론이죠. 정확한 정보와 판단이 있지 않으면 싸우지 못하잖아요.”

“그렇게 힘들게 만드시는 프론지도 모르고… 많이 봐드려야겠네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더욱 돕고싶은 마음이 우러나와 열심히 웃고 떠들어댔다. 넘 열심히 떠들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새어나왔다.

암튼, 그렇게 무사히 촬영을 끝내고 노랑님을 만났다. 휠체어에 앉아계신 노랑님. 작고 불편한 손에 옹골지게 계란을 쥐고 커다란 바위를 향해 던지느라 11년 세월을 보냈다는 이 여인은 평범하게 살지 않을거라 되뇌곤 했다는 자신의 어릴적 꿈처럼 현재 비장한 일을 하고 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는 없을지라도 알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바위의 모양은 서서히 변화되리라. 사회는 그렇게 변천되는 거라 생각한다.

아무튼 뿌듯한 하루였다. 정의가 반드시 이기는 옳은 사회를 꿈꾸며 내 가족의 작은 발걸음이 그 길목을 다지는 한 삽이 되었기를 바라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