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따러 가서 …

9월 중순이면 사과가 열리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저 사과는 아무때나 마켓에 가면 있으려니… 제 철 과일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이지만 그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산 세월이 길었다, 부끄럽게도.

캘리포니아 살 때는 봄철 딸기밭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끝이 안보이는 밭이랑이 나란나란히 늘어서고 그 넓은 딸기밭은 붉다기 보단 잎새초록이 짙었다. 수확철이면 멕시코에서 인부들이 계약직으로 올라와 너른 챙모자를 눌러쓰고 열매 하나하나를 따서 상자에 담는다. 그러고보니 아무리 수작업이 기계화되는 현실이지만 과일만은 일일이 사람의 손이 닿아야 얻어지는 열매였던가 보다. 그들은 혹 지나치는 손이 군침이라도 흘리면 한바구니 후한 인심도 건네준다. 순박한 그들에게서 한국의 시골인심을 떠올린다. (내 이론이지만) 후진국에서 건너 온 사람일수록 사람 정겨움이 살아있어 나는 좋아한다. 아이들은 신이났다. 옹골지게 가지에 매달린 사과를 떼어내기 위해 사다리에 오르고 가녀린 팔목에 힘이 들어간다. 가지가 휘엉청 휘어지고 사과 한 알이 작은 손에 남으면 ‘너도 가냐?’ 아쉽게 가지와 잎새가 안녕을 고한다.

작은 씨앗이 자라나 가지를 뻗어 다시 씨앗 품은 열매를 맺으면 그 과실은 바람에도 떨어지고, 사람 손에 떼어지고, 제 무게를 못 견디고 땅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생물들에게는 그렇게 한 생이 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모든 만남은 생각보다 짧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부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이해인님은 ‘백일홍 편지’에서 그렇게 읊었다. 반만큼은 살다보니 왜 그리 생이 짧다하는 지 이제 깨달아진다. 버나드쇼는 얼마나 한스러워 그랬을까.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죽을 때가 되어 한 말이라 했다. 인생이 짧다는 안타까움이다. 욕심부리다 짧은 세월이 진다. 그러니 욕심부릴 이유따위 없는 것이다. 욕심 사납게 손에 꼭 쥐고 살던 씨앗을 과감히 떨구는 큰 배포를 부린다면 내일은 그 씨앗에서 가지가 뻗고 더 풍요로운 열매가 맺으리… 한 인생 살면서 그렇게 큰 부자이고 싶다. 한 알 사과가 내게 사색을 주니 사과향보다 풍요로운 수확이다.

소녀시절, 내 살던 곳엔 사과밭은 없었지만 배밭이 넓었다. 먹골배가 열리는 과수밭… 하얀 이화(梨花)는 화려하지 않아서 더욱 수려했다. 내 기억에 벗꽃잎을 닮았다 했으나 다시 보니 무궁화를 닮은 배꽃잎은 봄에 만발히 피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낸 후 가을에 맺는 열매가 달고 촉촉하다. 그러고보면 도시태생이라고는 하지만 변두리에 살았던 고로 채마밭 사이를 걸어 등교하고 배꽃나무 아래서 시를 읊곤 하던 운치있는 삶도 살았던가 보다. 그 채마밭에서 어정거리던 까까머리 남학생들… 새초롬이 고개숙이고 걸음걷는 소녀를 향해 던지던 풋풋한 장난이 연정으로 승화되고 이젠 추억이 되었다.

소녀의 감성이 자랐던 곳, 먹골배밭엔 조선시대 금부도사 왕방연의 일화가 담겨있다. 왕방연은 어린 단종을 유배지로 호송할 때 책임을 맡은 사람이었다. 어린 단종이 갈증으로 목이 타는데도 물 한 사발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단다. 그것이 한이 되어 왕방연은 관직을 그만두고 먹골(현재의 묵동)에서 물이 많아 먹으면 해갈도 되는 먹골배를 키우며 살았다는 일화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흔님 여희압고 

내마음 둘데 업셔 냇가의 안쟈시니

져 믈도 내 안같하여 우러 밤길 녜놋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임(단종)을 이별하고

슬픈 마음 달랠길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마음 같아서 울면서 밤길을 흘러가는구나)

--지은이 : 왕방연, 

   출   전  : 가곡원류, 병와가곡집--

사과 따러가서 소녀시절 추억하고, 고향땅에 핀 배꽃을 그리며 왕방연의 시 한수 읊어 본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