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박이 우리 아린이 혼자서 흥얼흥얼 노래를 한다. 이번엔 무슨 노래일라나 가만히 귀 기울이니,

‘아빠는 일하고~ 언니는 학교 가고~ 엄마는 글쒸고~ 나는 놀고~ 라라라’

 란다. 자작곡이다. ‘글쒸고?’ 남편과 내가 동시에 큭큭 거렸다. 한국어 발음도 영어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우리 아린이, 킨더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인생 최대의 행복을 만끽하며 넘치는 흥을 저리 노래로 발산한다. 저렇게 (학교가)좋은 것을… 왜 끼고 살았나 몰라?, 내 입에서 나오는 상념이다. 혹 사는게 아주 풍족했더라면, 딱히 마음에 드는 프리스쿨이 있었다면, 동생이라도 생겼으면, 소원이던 학교에 보냈을 지 모른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보듬지 못할 아이의 어린 뺨을 후회없이 부벼대고 싶은 엄마의 욕심이 컸으리라... 솔직히 막판에는 아이를 끼고 있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혼란스러웠다. 이따금씩 진저리도 쳐졌다. 인생은 정답해설서가 없어서 난(難)하다. 많은 길이 있는데 훗날 현재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해야기에 인생이 어렵다. 다시 돌아가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을 싹뚝 베어버리고 새로 덧칠할 수 없어서 무섭다. 그런데 누구나 그런 기로에 서야한다, 정답해설서 따위 없으니까, 최선의 선택을 하고 담담히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어쩌면 인생에 대한 정답이 될까…… 아린이와 지지고 볶았던 세월은 어쨌거나 지나고 보니 후회나 아쉬움이 남지 않아 다행이다. 그리고 그런 끝에 맞이한 ‘자유’라서 더욱 소중하다. 그간의 내 배역은 밥하고 빨래하고 운전하고 소리지르는 역할로 남았을 것을 각오했다. 그런데 ‘엄마는 글쒸고~’ 란다.

가끔 사람들과의 교제가 있을 때, 나는 이유없는 채로 피곤하고 아파야 했다. 아이는 항상 곁에 있고, 난 아이를 제쳐두고 다른 짓을 하지 못했다. 학교를 보내지 않는 엄마의 양심이었던 것 같다. 낮에 아이와 놀다보면 체력이 약한 난 저녁시간즈음이면 녹초가 된다. 가끔은 그런 몸으로 늦은 시각까지 습작을 하곤 했고 그러다보면 틀림없이 몸에 무리가 왔지만 무명의 습작가라 내보일 것이 없었다. 나름 바쁘지만 남 눈엔 엄살로 밖엔 안 비칠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피곤과 아픔엔 이유가 없어야 했다. 해리포터의 작가 J.K. 롤링은 아이를 실컷 놀리고 아이가 피곤해 곯아떨어진 동안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천부적인 소질도 있겠지만 그녀에겐 체력이 있었다. 타고난 것이 적으니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난 그저 꿈을 꾸며 보내는 시간이 길다.

그러다 불혹이라는 반인생의 정점을 앞에 두고 가슴에 소슬바람이 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도 내겐 내 인생이 있어야 한다는 철학때문이었을까. 아직도 꿈이 꿈으로 남아서 그랬을 것이다.

결혼 전 남편에게 손가락을 내밀며 약속해 달라고 했다.

“자기는 나에게 돈 벌어다주는 남편으로 존재하지 말고 나는 자기를 위해 밥하고 빨래하는 아내로 있지 말아요!”

살면서 꼭 지켜지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손가락을 거는 내 마음은 그래도 뿌듯했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난 아내이기도 했지만 엄마였다. 밥하고 빨래하고 운전하고 소리지르면서 살고 있는 나, 내 아이들의 눈에 비쳤을 엄마의 모습이 그러하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는데…

‘글쒸는 엄마’라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가끔씩 내보인 엄마의 꿈을 기억하고 예쁘게 그려준 다섯살박이 아린이는 역시 나의 수호천사이다. 밥하고 빨래하고 운전하는 엄마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그치만 내겐 나의 꿈이 있으므로 그런 엄마이고만 싶지는 않았다.

먼 훗날, 남들 앞에서 내 꿈이 꿈으로만 남는다 하더라도 괜찮지 싶다. 내 딸들의 가슴 속에 ‘꿈을 가진 엄마’로 추억된다면 나는 행복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