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라이즈드 사랑

여름이 저물어 가는 어느날, 남편 직장 동료인 M의 결혼축하파티에 다녀왔다. M은 프랑스인이고 그녀 남편은 미국인이다. 그녀는 친정이 있는 프랑스의 한 성당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말괄량이 조카 들러리가 성공적으로 들고 간 반지를 교환하며 성혼을 했단다. 웨딩세러모니가 끝난 후 가진 피로연에서 프랑스식으로 네 번의 식사를 하고 아버지와 댄싱을 즐기는 모습이 앨범에 담겨 있었다. 두번째 세러모니는 그녀 시부모님이 계시는 조지아주의 사바나 비치에서 열렸다. 그녀는 조금 드레시한 평상복을 입었고 반지 대신 붉은 장미를 교환했다. 그리고 이번이 세번째, 직장이 있는 로웰, 메사츄세츠에서 야외파티를 연 것이다. 화장기없는 맨 얼굴에 코밑엔 노란색 잔수염이 보이고 앨범을 열어 사진을 보여주는 손바닥은 주부습진을 앓는 것처럼 살갗이 일어나 있었다. 의외적인 신부의 모습이지만 행복을 직접 일구는 손을 대한 듯 마음이 경건해 졌다. 왜 안그러겠는가. 짧은 여름동안 그들은 개미처럼 부지런떨며 ‘분주한 결혼’을 해내지 않았던가!

나무가 둘려서 그림자를 만든 너른 풀밭에 아이들이 뛰놀고 그 한편에 하얀 플라스틱 테이블세트가 여나무개 놓여 있었다. 먼 곳 작은 스테이지에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남자가 있고 고기굽는 냄새가 정열적으로 식욕을 자극했다. 전원속 소박하고 아담한 파티장이어서 더욱 정겨웁고 포근하고... 그래서일까, 그들의 사랑에서 아주 오랜동안 향내가 날 것 같았다.

아이들은 배부르고 함께 놀 친구가 있으면 즐겁다. 마냥 행복에 겨운 것은 그들의 특권인 듯 싶다. 우리 딸들, 남의 아들들, 또 다른 남의 딸들과 아들들이 특권을 향유하듯 마구 뛰어다녔다. 그 중엔 중국애도 있고 미국애도 있고 한국애도 있고 나는 모르지만 유럽이나 러시아 애들도 있지 싶고 또 멀티레이셜(혼혈)도 있다. 알렉스는 중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를 가졌다. 중국어도 하고 영어도 한다. 우리 딸들 역시 한국어도 하고 영어도 하지만 왠지 알렉스의 바이링거(2중언어 사용하는)는 다른 느낌이다. 하나는 엄마네 말, 하나는 아빠네 말이니까. 그렇게 엄마랑 쓰는 말과 아빠와 쓰는 말이 다른 아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M이 흔히들 한 번 하는 결혼식 피로연을 세 번에 걸쳐 치뤄야 했던 이유도 그들이 국경을 넘어선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은 글로벌라이즈드 되고 있는가 보다. 아주 오래 전엔, 종족보존을 위해 친인척 간에 맺어지곤 했던 부부의 연, 이제는 바다도 넘고 사막도 건너는데… 몬테규가와 캐플릿가의 사랑이 성립되지 못하는 시대에 태어난 로미오와 쥴리엣이 더욱 비련스럽다. 감정의 늪이어서 넘지 못한 사랑이런가! 그러고보면 감정처럼 높은 산은 없어 보인다.

내 어릴적, 대로에 서서 오가는 행인을 붙잡고 검지와 중지만 길게 뽑아 입술에 대고 양치하듯 좌우로 흔들며 ‘케키, 케키’했던 아이가 생각난다.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보풀 인 실타래처럼 부스스한 노란색 머리는 눈에 선하다. 왜 그런 제스츄어를 취하는지 모르지만 그 아이가 원했던 것은 아이스케키였다. 사람들은 우유빛 피부에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가진 그 아이에게 ‘예쁘다’는 찬사를 던지며 바로 옆 점방에서 아이스케키를 사주곤했다. 동네 아줌마들도 예쁜 것, 하며 자주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꼭 끝에 붙는 말은 ‘양색시 딸’이란 소리였다. 어린 내 귀에도 존중하는 뉘앙스로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 의식이 있었다, 당시에는. 술집 작부가 아니더라도 서양인과 결혼한 여자는 양색시란 호칭으로 불리우는 오해를 면키 어려웠던 모양이다. 지금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태어났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아이…… 그 아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멀티레이셜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그들은 다중 문화를 이해하고 다국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글로벌라이즈드 인재들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의식과 감정은 시대에 따라 거듭나기 십상이다. 내 것만 옳다는 사고방식에 대한 또다른 반증이다.

M의 세번째 결혼축하 피로연은 맛있는 식사와 저마다의 이야기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M의 아이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우게 될 것이다. 바이링기스트의 특혜를 가지는 인재들이 세상에 자꾸자꾸 태어나는 오늘날, 글로벌라이즈드 사랑이 수채화처럼 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