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내가 그와 결혼한 이유

그를 보면 농부의 아들이 떠오른다. 농부면 농부지 왜 아들일까,를 생각해 보니 그가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허나 그의 아버님 역시 사무직이셨다니 농사와는 거리가 먼 가계다.

그러면 왜 나는 그에게 농부의 아들이란 이미지를 덮어씌웠을까? 검게 탄 피부, 그것도 오랜 시간동안 햇볕을 받아 메마르고 반질반질해진 이마에 밭이랑을 연상케 하는 주름, 허리 위로 바지를 추켜 올리던 모습, 모자를 벗어 납작하게 눌린 머리에 부채질 하던 품새, 산에서 커피를 마신 후 여러 차례 배뇨를 해야했던 에피소드, 누군가의 전언에 의하면 취중에 허리띠를 풀러 하늘을 향해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등등을 종합해 본 결과였다. 나는 그가 농부의 아들답게 하늘에 대고 비를 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

그는 남편의 대학친구다. 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수차례 만났고 산행도 같이 하고 미국에도 놀러왔다. 그는 애주가이고 수다와 농담을 즐겨한다. 그의 아내가 전하던 취중 무용담이 나무의 잎새만큼 많았을 때, 나는 그녀가 어떤 매력을 느껴 그와 결혼했을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이상했던 건 남편 흉?을 보면서도 밝게 웃던 그녀의 눈이었다. 

그런 그가 비 오는 날 술을 마시고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남편이 피식거리며 **이가 평소와 다른 글을 올려서 댓글에 난리 났다고 했고 나는 호기심이 일어 보여달라고 했다.

우중취설

비가 옵니다.

(…)

집에 오는 길에 아파트 화단과 보도블럭 틈새에 끼어 자라는 여러 식물들을 봅니다. 아침 출근길에 보면서 이뻐 보이기도 했고, 뜯어서 먹으면 참 맛나겠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들입니다. 촉촉한 빗물을, 약간 서늘하지만 고개 숙이고 반갑게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에 자주 보는 TV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가 있습니다 (….)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나중에 마당이 생기면 심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생각해 봅니다. (…) 냉이, 지칭개, 제비꽃, 민들레, 왕고둘빼기. 이런 녀석들은 부르지 않아도 잘들 찾아 오겠지요

(…) 이런 식물들이 편한 까닭은 그들이 말하는 어려움의 소리를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외면하기에 겸연쩍거나 미안하기가 덜합니다. 가끔은 나 좋자고 상대를 꺽기도 해 버립니다.

지금 상황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 친구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냥 같은 세상에서 거기 옆에 있을 수 밖에요. 그래도 에네르기 파동을 힘껏 보내봅니다. 같이 힘내서 뚜벅뚜벅 걸어 나갑시다. 지나고 나면 모두 내 경험이 되고, 지나간 것은 모두 그리워질 날이 곧 올겁니다.

두 번 읽고 세 번 읽었다. 마음이 참 따뜻해졌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외면에 가려 미처 그의 훌륭한 내면을 보지 못했던 나는 역시 미숙했다.

예전에 나는 외모가 훤하고 세련된 남자를 좋아했다. 그때 내가 하도 남자를 못 만나니 큰외숙모는 이런 조언을 하셨다. “결혼할 남자를 선택할 때, 외모는 신기루 같은 거다. 다 갖춘 사람은 드무니 실력과 사람 속을 중히 봐라. 외모는 늙어지지만 실력과 성품은 세월과 상관없이 빛이 난다.” 생각해보면 외숙모님의 조언은 제비추리? 같은 잘난 뒷꼭지에 반해 결혼했다는 외삼촌과의 삶에서 얻은 처절한 득도였는데 그때는 와닿지 않았으나 지금은 마치 내 속에서 자라난 뿌리처럼 생각의 근간이 되었다. 나도 그새 성숙해진 것이다.

나이 들면 남자 보는 눈이 달라진다. 예전에 멋져 보이던 것들이 하잘 것 없어지고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성품, 성실함, 인간됨, 실력, 매너… 딸들의 짝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게 되리라. 알고보니 그의 아내는 처음부터 혜안으로 그를 알아본 모양이다. 남편 걱정을 하면서도 그렇게나 밝은 미소를 짓는 걸 보면 여전히 많이 위하고 사랑하며 사는가 보다. 윗 글을 읽어보니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PS

그가 의도했건 안 했건, 내가 왜 그리 자연을 사랑하는 지 깨닫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은 감동은 줄 지언정 우리를 슬프거나 화나거나 불안하거나 조급하거나 부담을 주거나 걱정스럽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평온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그의 우중취설 덕분에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기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