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다시 일어서는 거야!

충남대학교 안의 크고 네모난 연못엔 잉어들이 있었다. 주황색 봉지를 들고 연못 속을 들여다보며 웅성대는 앳된 남학생들도 있었다. 잉어가 새우깡을 먹었는지 와르르, 웃었다. 순진무구해 보이는 학생들 덕에 미세먼지 낀 봄날이 그런대로 싱그러워 보였다. 남편과 나는 엔진모양 적색등이 켜진 차를 딜러에 맡기고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준 벤치에 앉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부품을 갈아야 할까? 2004년도산 혼다 오디세이는 23만 마일(약 35만 키로)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남편은 계기판 숫자가 222,222를 가리키는 순간 사진을 찍겠다고 했었다. 나는 유치해서 피식 웃었다. 남편은 같은 숫자가 여러 개 나열된 모습을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222,222 이후 같은 숫자가 되려면 333,333일텐데 앞으로 7,8년은 더 버텨주어야 하므로 아무래도 무리같고 그래서 이번에 찍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222,222 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두는 것도 꽤 멋진 일 같았다. 14년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차의 폼나는 영정사진을 만들어주는 의미에서 였다. 그런데 222,222가 되는 순간 남편은 혼자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나는 은근히 안타까웠다.

막내의 카시트를 얹고 다녔던 차, 캠핑 장비를 싣고 다녔던 차, 아이들과 남편을 수없이 등하교 시켰던 차, 때때로 7명을 꽉꽉 태우고 다녔던 차, 중간 좌석을 떼내고 뒷좌석을 눕히면 퀸사이즈 매트리스가 들어가고도 남을 공간이 되어 준비없이 간 요세미티 공원에서 우리 식구 4명의 텐트가 되어 준 차, 라이드 하다 힘이 들면 기다리는 동안 작은 몸을 뉘어 편하게 잠잘 수 있게 한 차, 밑의 집 아자씨의 횡포로 살 집이 없어진 순간에 적어도 어디든 갈 수 있게 곁을 지켜준 차, 조지아에서 캘리포니아로, 캘리포니아에서 매사추세츠로 이사 가는 동안 미국 38개 주를 돌아다녔던 차,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차, 천안에서 살다가 대전에 살고 있는 차, 우리 강아지 로우지를 태워 온 차,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부산하게 움직인 차, 그러다 이곳 저곳 고장이 나기 시작한 차, 엔진이 멈추면 이제 영원히 이별할 차…

잉어가 헤엄치는 연못 앞에서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우리 차 타기가 겁난다고 하셨다. 달리다 길 한가운데서 멈춰설까봐… 농담처럼 말씀했지만 진심임을 알았다. 엄마는 이번에 임플란트를 3개나 하셨다. 몇 년 전에도 했었고 부분 틀니도 했는데 철심이 입에서 까끌거리니 먹기도 불편하고 음식 맛도 모르겠다고 했다. 엄마는 전주 출신 답게 음식을 정말 잘 하셨다. 들깨를 곱게 갈아 무친 머우대나 야채를 듬뿍 넣은 오징어 초무침, 진한 육개장, 닭볶음, 떡국, 갈비, 각종 마른반찬… 하다못해 생선전 하나에도 비법이 있어서 음식 맛이 융숭하고 깊었다. 오래 두고 먹어도 맛이 좋았다. 음식을 만들면서 씹어보고 간을 보던 입 속에 자꾸 이상이 생기니 요리할 맛이 안 난다 하셨다. 의사가 ‘80년 쓰신 치아인데 오랫동안 수고했으니 이젠 쉴 때도 됐죠’라고 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우리 엄마는 당신 몸을 스스로 잘 돌보시므로) 열심히 달리다 이곳저곳에 고장이 난 차에서 엄마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쎄해졌다.

이번엔 토크 컨버터가 나간 모양이다. 고치려면 3,4백만원은 들거라고 했다. 우리 차를 담당했던 테크니션은 함구하고 있었지만 그 돈을 들여 고칠 필요성에 대해선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는 눈빛이었다. 이미 35만 키로를 달린 14년 된 차, 앞 뒤 범퍼는 상처 투성이고 군데군데 칠이 녹슬고 앞 유리는 길게 금이 가고 에어컨은 1,2단이 작동되지 않고, 엔진도 언제 수명을 다할지 모르는 차… 그런 차에 3,4 백만원을 들이는 건 누구라도 재고에 삼고를 할 것이다. 테크니션은 겸손하지만 안 된 표정을 지으며 수고비를 안 받겠다고 말했다.

막내에게 청년이 한 말을 전했다. 체크비용이 3만원인데 그 오빠가 받지 않겠다고 했어, 어쩌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혼다차를 본 적이 없고 엄마 아빠가 그런 차를 타고 다니니 불쌍하고 돈이 없다고 생각했나봐. 그 오빠 눈이 참 착하게 생겼더라…

그런데 막내는 의외의 질문을 했다. "그 오빠가 직접 그렇게 말했어요?" "아니." "그럼 엄마아빠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낡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왜 불쌍한가요? 남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추측하는 자체가 엄마아빠의 선입견이고 자격지심 아닐까요? 그건 불쌍한 일이 아닌걸요."

생각지 못한 막내의 반격은 의외였지만 우와~ 많이 컸다는 감회를 일으켰다. 카시트에서 꼬물대던 녀석이 이렇게 컸으니 우리 차도 그동안 엄청나게 수고했다. 번쩍번쩍하던 새 차가 덜거덕 대고 아장아장 걷던 손녀가 이렇게 훌쩍 자랐으니 엄마의 곳곳에 당연히 세월이 스몄겠지…

차를 고쳐서 다시 쓸까, 그냥 폐차를 시킬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차를 살 적기가 아니고 아직 엔진이 건재하고 우리의 추억이 가득하고 식구처럼 정이 든 차를 고치기로 결론을 내렸다. 엄마의 치아도, 우리 차도 잘 고쳐서 다시 생생한 생명 얻게 되기를… 희망은 항상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