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야시장에서…

동대문 야시장 가보기,는 간절하진 않았지만 내 버켓 리스트 한 귀퉁이에 들어있던, 언젠간 해보길 원했던 항목이다. 2018년 6월 14일, 어쩌다보니 나는 동대문 시장 근처에 숙소를 잡아 놓고 15세 딸내미와 함께 동대문의 야밤을 어슬렁 거렸다. 간절하진 않았지만 위시 리스트가 심상히 실현되고 있는 그 현실은 갱년기 무감각증에 빠진 내게 조금 감동이 되었다.

밤은 깨어졌고, 생각처럼 옅은 어둠, 낮의 매연이 수그러든 공기, 험상궂은 취객보다 멋쟁이 여인들의 흥겨운 수다로 메워진 거리 덕분에 1도 없었던 두려움… 딸이 동반해 주어서 감히 엄두를 내면서도 15세 딸한테 과연 적절한 여행이 될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결론은 한번쯤 해봐도 좋을 경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현장도 사회의 일 면인 것이다. 딸아이는 상인들의 수면시간을 걱정했다. 세상엔 이렇게 날밤을 새우며 일하는 직업군도 많지… 딸아이는 쌩쌩하게 살아있는 그들의 밤이 이 사회를 돌리는 한 축임을 직접 확인했다.

수많은 중국 처자들과 일본 아줌마들(정말 중국인들은 젊은 연령층이 많았고 일본인들은 대부분 중년이었다)은 여행과 삶의 현장의 뒤범벅 속에서 신이 난 모습이었다. 오토바이 배달원들이 낮동안 행인이 다녔던 골목에 즐비하게 늘어섰고, 보도블럭 옆에 간이로 천막을 친 중국 택배사에선 직원들이 포동포동한 소포를 잔뜩 쌓아 놓고 그 모습이 신기해 기웃거리는 나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상인들은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사실 중국인들은 면세점이나 백화점에서도 엄청난 양의 쇼핑을 한다. 나는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들어 친절한 미소를 보낸다. 한국 상품, 많이 사주세요^^

14일에서 15일로의 다리를 건너며 길바닥에서 깨어 있던 순간, 미국 살 때 Black Friday에 딱 한번 해봤던 밤샘 쇼핑이 떠올랐다. 축제처럼 들떠 있던 그날의 발걸음처럼 이 날의 다리도 가벼웠는데 이는 12일에 염원하던 북미수뇌부의 만남이 잘 이루어졌고,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한반도에서 핵전쟁 위기설 같은 건 사멸되었을 뿐 아니라 종전선언에 이어 평화통일까지 이어지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붕붕 하늘을 날고, 13일에 시행된 국민투표에서 제대로 된 이 나라 대통령과 그 정당의 행보가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역사의 선순환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제법 잘 돌아가고 있다! Hurray!!

(최악을 피하기위해 차악을 선택한다는 서글픈 일부 현실만 보정되기를…)

내가 야시장에 대해 로망을 품기 시작한 건 고교시절 무렵이었다. 같은 반 친구 왈, 자기 언니는 굉장한 멋쟁이인데 큰 가방 하나 메고 야밤에 남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사온다고 했다. 밤에는 싸게 살 수 있는데, 단 옷가게를 하는 사람처럼 큰 가방을 메고 다니면서 샘플을 고르는 것처럼 행동하면 상인들이 도매가로 준다는 것이다. 그때 내 머리속에는 친구 언니가 북적대는 소매상들 틈바구니에서 능숙하게 멋진 옷을 골라 어깨에 맨 커다란 보스턴 가방에 가득 채우는 모습이 그려졌는데 불현듯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다. 그리고 약 35년이 지난 6월의 야밤에, 딱 그 나이가 된 딸을 데리고 동대문 시장에 나타난 것이다. 내 재주로는 소매상처럼 보이는 건 꿈도 못 꾸지만 요즘은 아예 상호명을 등록해 놓고 거래를 하고 있어서 제아무리 베테랑인 친구 언니라도 더 이상 그런 수법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2018년 현재, 남대문 시장은 그리운 옛, 혹은 상징화된 장소가 되었고 패션 타운으로는 동대문 시장이 빛을 발한다.

사실 ‘동대문 야시장’이라 하면 그 바닥에서는 노란 텐트를 의미하는 듯 보였다. 관광안내소에서는 안내를 꺼리는 눈치였지만 동대문의 또 하나의 이벤트로서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반짝 열리고 철거되는 짝퉁 행상이 있다. 그들은 노란 텐트를 쳐서 밤을 달처럼 밝혔다. 나는 명품을 잘 모를 뿐 아니라 관심조차 없어서 그 짝퉁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 졌는지 모르나 말로만 듣던 짝퉁시장을 본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손님들은 많지 않았다. 명품이나 짝퉁이나 나로서는 문외한이어서 뭐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굳이 내 소견을 밝히자면, 짝퉁이 98% 진품처럼 만들어졌다면 굳이 왜 명품을 사야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명품의 장점 중 하나는 질이 좋고 대를 물릴만큼 오래 사용한다는 점이겠는데 짝퉁도 재질과 제조방식과 디테일이 비슷해서 같은 장점을 가진다면 가성비로 따지면 비교할 수 없도록 짝퉁이 우세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구매에 있어 가성비를 최우선으로 하는 내 기준이니 진품이 주는 매력을 아는 구매자들은 분명 다른 의견을 가질 것이다. 게다가 상도덕에 어긋난 범법행위는 어따 두고 가성비 운운이냐고 비판할 수도 있을 텐데 뭐, 할 말은 없지만 명품계에서 브랜드 값으로 소비자의 주머니를 도둑질 하는 행위는 정당한가,란 반문은 떠오른다. 나는 바가지가 마땅치 않다. 상품은 품질이 잣대가 되어 그에 적합한 가격으로 책정되어야 한다. 이름값의 바가지는 나쁜 기만이다. 만약 명품의 바가지가 없다면 짝퉁도 없을 것이다. 명품의 값이 합리적인 수준이면 짝퉁 설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명품을 사고 말지.

이런… 어쩌다 보니 짝퉁 옹호론자 같은 말을 잔뜩 했는데, 짝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의 바가지를 성토하는 것이다. 다시 밝히지만 나는 짝퉁에도 명품에도 관심이 없다. 다만 이 세상이 브랜드 따위 상관없이 사람이든 제품이든 내면과 질과 내용이 중요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만 한가득일 뿐…

6월 중순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새벽에 동대문 야시장을 돌다 보니 밤을 새우며 열심히 사는 상인들에게 살만한 세상이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한쪽으로 몰리는 부의 재분배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바람이 일어 이런 소회까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