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사할 수 밖에 없었지만...

뭉게구름 핀 새파란 하늘, 그 평온한 푸름에 가 닿으려는 듯 초록 잎새들이 풀럭댄다. 쏴아쏴아 잎새 부비는 소리가 들릴 때면 영락없이 머리카락이 날아와 뺨을 간질였다. 등지고 앉은 어깨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고 해의 손바닥은 알맞게 따스했다. 바람속에서도 나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꽃무늬 쟁반 위엔 떡과 차와 과일과 견과류가 놓여있다. 삐죽삐죽, 얼굴에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삶에서 추구하는 것은 단 하나, 평온이 깃든 이런 행복이다. 다른 건 필요 없다. 그냥 자연안에서 평온하면 된다. 식구들을 배웅한 후, 옥탑방 발코니에서 나는 소꿉놀이하듯 이렇게 일상을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인사한다. 그럴만도 했다. 고생 끝에 가까스로 얻은 공간이 이토록 귀해서…

지난 6월말부터였다. 나는 살 집을 구하는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9월중순에 끝나는 계약을 12월까지 연장하고 싶다는 우리 요청에 집주인이 집을 팔아야 해서 어렵겠다는 답을 주었는데 그날은 마침 휴가로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남편 연구년 스케줄대로라면 12월에 도미하지만 막내와 나는 학기가 시작되는  여름에 떠날까 고심하느라 계약할 때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 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집주인은 매수할 사람이 없다면 살아도 되지만 12월까지 보장해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 조건은 아무래도 불안하여 집세를 올려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2,3일 후 아무래도 계약대로 해야겠다는 두번째 통보를 받았다. 그때는 그냥 주인댁에 급한 사정이 있는가 보다, 란 생각을 했고 3개월간 살 집을 구해야 겠다는 궁리만 했다. 그런데 여행 마지막날, 그냥 월세로 내놓기로 했으니 더 살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온 일방적인 갑질통보였다. 3개월간 집 보여주기, 월세 15% 올려주기, 계약일에서 하루만 더 연장해도 한 달치 월세 내기… 그렇지 않아도 난데없는 이사문제 때문에 여행지에 산이 있는지 바다가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건만, 알고 보니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제 이익에만 포커스를 맞춰 이러쿵 저러쿵 마음을 쓴 집주인에게 인간적인 배신감이 일었고 그래서 휴가는 퍼펙트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그러고보면 의식주는 인간 삶의 3대 기본 요소 맞다. 기본이 위태로우면 여가 생활은 영위되기 힘들다.

내가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낀 이유는 이 집주인한테는 세입자가 단지 돈벌이 수단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입자의 사정을 헤아려 주기는 커녕 분명 3개월 때문에 이사하진 않을 거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귀찮은 일일 뿐 아니라 이사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남의 사정을 이용해 말도 안되는 갑질을 하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려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후 나는 집찾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두 번 이사를 하면 비용이 많이 드니 아예 미국 갈 짐만 들고 들어가도 살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정 없으면 원룸 같이 냉장고, 세탁기 정도만 구비되어 있는 곳이라도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는 3개월이라는 기간이었다. 3개월간 렌트를 주고자 하는 집주인은 별로 없다. 부동산 수수료가 들고 자주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참고로 한국은 수수료를 양측에서 내는 시스템이다). 정 못 찾으면 주인 수수료도 내줄 각오도 했다.

부동산 웹사이트를 뒤져 이곳저곳 연락을 하자 그닥 멀지 않은 동네에서 아파트 단기 렌트하는 곳이 있었다. 그 댁은 마침 8월에 미국으로 1년 연수를 가는 지라 서로 사정이 잘 맞았다. 집 안은 지저분했지만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계약을 마친 후 한시름 놓고 8월을 지냈다. 그런데 막판에 계약이 파기되는 일이 벌어졌다. 발등에 그야말로 불이 붙은 것이다. 아파트고 원룸이고 오피스텔이고 어디든 냉장고와 세탁기만 구비되어 있으면 보러 다녔다. 허나 실물을 보면 주변환경이 나쁘거나 환기가 잘 안 되거나 그나마 괜찮으면 주인이 계약을 원치 않거나… 사정은 영 녹록치 않았다. 그러다가 이 집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산속에 지어진 산장 같은 빌라단지인데 주인댁은 복층 연결통로를 막고 옥상 출입문만 열어놓아 옥탑방 같은 시스템으로 세를 놓고 계셨다. 박원순 서울시장처럼 깊은 체험을 위한 도전은 아니지만 천장이 급격히 낮아지는 방 하나라 막내 침대는 복도에 있고 원래 화장실이던 곳에 싱크를 들여놓은 조악한 부엌, 앉아서 샤워를 해야 하는 욕실을 체험하는 도전은 해야 했다. 하지만 툭 트인 거실과 화단과 야외테이블까지 놓인 너른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조경이 그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도 남을 매력덩어리였다.

아파트가 빼곡이 들어찬 전 집에서는 하늘이 푸르면 푸른 대로 미세먼지가 짙으면 짙은 대로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산과 바다를 찾아 떠나야 할 것 같았고 미세먼지 때문에 외출을 삼가해야 하는 날에는 꼭 갇힌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때 깨달았다. 시골분들이 왜 아파트를 감옥같다고 하시는지… 미국 사는 동안 자연과 지독히 친해져서 앞 뒤로 아파트만 보이는 환경에만큼은 도저히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도 깨달았다. 그러면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전원주택에서 닭도 키우고 상추, 깻잎과 방울 도마토도 키우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멋스런 아침도 먹으면서 자연과 한 식구하며 지내는 미래에 대해… 도시출신인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이런 꿈을 꾸진 않으리라. 14년간 미국에 살아서 이런 꿈을 갖게 되었다.

어쨌거나 고백하자면 최근 1년여 동안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처음부터 이 집에 살았다면 지금처럼 소소한 기쁨을 극대화 시켜 느끼지는 못하리라. 긴 위기를 통과한 이후라서 더우기 행복한 걸 게다!

이 글을 쓴 날처럼 푸름푸름하진 않지만 요즘 한국 하늘은 요렇게 예뻐요^^(사진보다 더...)

제가 한 눈에 반한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었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