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엄마의 마음

찢어진 귤박스를 본다.

냉장고에 자리가 없어 야외 발코니에 내놨더니 간밤에 내린 비에 흠뻑 젖어서 옮기는 동안 찢어졌다. 귤을 꺼내 닦는다. 박스 젖은 모양새로는 안에 꽤 물이 고였을 줄 알았는데 물은 커녕 귤도 별로 안 젖었다. 키친 타올 한 장으로 7키로는 됨직한 양을 다 닦았다. 굵은 알, 작은 알, 껍질 까칠한 알, 맨지르한 알… 한 밭에서 딴 것인데 제각각 다르다.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들처럼… 제 각각인 귤들이 형제를 닮은 것처럼 퉁퉁 불은 진갈색 박스는 그녀와 미쓰 백을 닮았다.

그녀,

귤알이 젖을 새라 내리는 비를 쏙쏙 흡수한 박스, 흐물대고 찢어져서 이제 만신창이가 된 박스, 큰 아이 유치원 시절에 사별로 남편을 잃고 십 수년동안 두 자녀를 키우고 지켜내느라 언제부턴가 공황장애가 생긴 그녀. 그녀는 창문도 없는 사우나 로비 한 구석에 마사지실을 만들어 주말도 없이 꽃다운 30대를 보내고 지금은 46세가 되었다.

다른 이의 어깨를 풀어주고 등과 하체의 순환을 돕느라 몸을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어깨가 뭉치고 팔에서 경련이 생기고 등은 딱딱해 졌다. 그녀는 본디 살림이 재미있어서 집에서 먼지를 쓸고 아이들을 위해 수제 간식을 만드는 행복으로 살았다. 일찍 결혼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오직 그것 뿐이었건만 아이들을 지켜내야 하는 책임을 남기고 남편이 훌쩍 떠났을 땐 황망해서 어쩔 줄 몰랐다. 미용기술을 배워 마사지실을 차린 후 맑은 바람 한줄기, 햇살 한 움큼이 그리울 때면 남편 생각이 더 나 숨죽여 울었다. 잠을 설쳐도 다음 날에는 달처럼 일어나 출근을 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부터 재능을 보여온 미술로 큰 아이가 홍대 미대에 입학한 것도,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한 작은 아이의 대학 등록금 마련도 습한 공기를 품고 햇살 한 줄 안 퍼지는 마사지실에서 귤박스처럼 견딘 그녀의 마른 몸뚱이 덕이었다.

친구도 못 만나고 단풍구경도 포기한 채 살아온 그녀의 인생… 아직 젊고, 웃으면 애잔한 미소가 너무 예뻐서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그녀는 하지만 아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하자 그제서야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심장이 난타북을 쳐대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자신을 마주보았다. 십수년 동안 조용히 비를 흡수하던 그녀의 마른 몸뚱이는 진작부터 찢겨져 있었다. 그것을 알고도 모른척 버티던 그녀는 이제 마사지실을 떠난다. 맑은 하늘 아래서 낙엽도 밟아보고 봄꽃향을 맡으면 병이 나을 거란 희망을 품고…

그녀에게 좋은 남자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아이들이 착하게 잘 커줘서 귀한 엄마의 공과 인내를 치하해 주지만 언젠가 새 보금자리를 찾아 훌훌 날아가려면 엄마 곁에 누군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자식은 나를 통해 세상에 나온 하나의 개체일 뿐임을 아는 그녀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사랑하고 사랑해주는 남자의 손을 잡고 함께 낙엽을 밟고 봄꽃향을 맡으면 그녀는 예전에 좋아했던 살림할 기력을 찾게 되겠지... 그녀의 눈이 슬몃 젖어들었다. “그래요, 그러고 싶어요. 저 아직 예쁘지요?” 나는 밝게 웃으며 한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미쓰 백,

미쓰 백은 귤이어야 할 나이에, 박스가 되어 온갖 세상의 바람과 눈비를 맞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속 주인공 미쓰 백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미쓰 백의 직업도 마사지사다. 남의 등짝이나 만지는 년이… 라는 말을 듣고 길을 떠나기 전까지, 미쓰 백은 한겨울에도 얇은 외투만 걸치고 세컨드 잡으로 손목이 부러져라 남의 차를 닦으며 억세게 살아왔다. 미쓰 백은 눈비에 젖고 마르고 또 젖다 마르기를 반복해 울퉁불퉁 얼룩덜룩 헤어진 종이박스다. 어려서 학대 받고 버려진, 스스로를 보호하려다 치명적인 범죄자가 된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지 않기 위해 입구조차 단단히 봉한 처절한 박스다. 안에 귤 같은 걸 품고 있을 리 없는 미쓰 백은 자신을 닮은 한 여자아이를 만나 느닷없이 뚜껑을 연다. 안은 의외로 온갖 풍파에도 단단해진 따스한 새집 같다. 그 안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아이는 그 품을 잊지 못한다. 정말 감동적인 박스다.

세상에는 번지르하고, 보기는 좋지만 겉을 꾸미려다 안은 냉랭하고 딱딱하고 답답한 박스도 있고 세상에는 젖은 풍파 다 맞서느라 젖고 찢어져 곧 폐기시켜야 할 것처럼 생겼지만 안에서 보호받고 평안을 느끼게 하는 박스도 있다. 나보고 둘 밖에 없으니 그중 택하라면 기꺼이 두번째가 되고 싶다. 그것이 보편적인 엄마의 마음일 것이다.

-2018년 11월 어느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