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 것 다 가진 사람들

4월의 이스터.

잎새들이 세상에 막 몰려나와 더없이 부드러운 녹음이 사방에서 하늘거린다. 전날 지나간 비폭풍에 잔디는 젖고 덕분에 더더 공기가 맑고 하늘이 파랗고 유리가 반짝였다. 차를 타고 가다 멋지고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4,5층 이상의 건물들을 줄줄이 만나면 아, DC에 왔구나 깨닫게 되는데 빌딩이 병풍처럼 둘러진 도시의 공원에도 여지없이 연두빛은 꽉 차 있었다.

워싱턴은 극과 극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쭉쭉 뻗은 도로와 백악관, 기념관, 세계적인 박물관과 미술관이 집결된 다운타운의 위대함과 흥과 웃음이고, 또 하나는 울퉁불퉁한 도로인근의 상자같은 집에 고인 고된 한숨과 노숙자들의 침잠이다. 어디든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기 마련이어서 세계 으뜸 수도의 양극상도 그러려니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정부보조가 탁월한데도 홈리스로 살아가는 인생은 지난 세월에 어떤 사연이 있는가 궁금해진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홈리스들은 가난 때문에 거리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삶에서 맞닥뜨린 특별한 고난에 날개가 꺾여버린 거라고 했다. DC 시내 한복판에 날개 꺾인 사람들이 모이는 녹지공원이 있었다.

그곳에 갔다. 하얀 테이블 위에 옷과 가방, 생필품, 음식 등을 다 꺼내놓기도 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직 시작전이라고 해도 마음에 드는 물건을 집고 되돌려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물건을 겨드랑이에 끼우거나 손에 든 채 기다리겠다고 하고선 곧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노숙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곳으로 자선단체가 많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마음마저 가난한 사람들 같았다. 노숙자는 있는 것도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라 물욕을 부리지 않는다. 한 무리의 중국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여러 번 줄을 서서 물품을 가져갔는데 나중에 떠날 때 보니 봇짐장수만큼 커다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그 짐을 들고 돌아갈 집이 있어 보였지만 노숙자들보다 더 안 되 보였다.

공원에서는 나뭇잎과 햇볕이 만나 광합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긴 줄이 담장처럼 세워졌을 땐 응축된 노숙자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지난한 시간이 느껴지는 냄새였다. 익숙하기도 했다. 생김새와 사용하는 언어,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다르지만 미국과 한국의 노숙자 냄새가 흡사했다.

한국의 한 역부근 쪽방촌 사람들은 노숙자는 아니었지만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잘 씻지 못해서 육체의 냄새가 심했다. 겨울철엔 쉘터로 일찌감치 몰려와 추위를 피하고 여름철엔 쉘터의 선풍기 앞에서 땀을 말렸다.

노숙자 봉사를 하다보면 사람들의 두가지 행동패턴을 대하게 된다. 웃는 태도와 화를 내는 태도. 따뜻한 음식이 담긴 식판을 건네면 수줍어 말은 안 해도 눈빛이나 태도로서 충분히 마음을 전달하는 분들이 있다. 게중엔 용기를 내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거나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분들도 있다. 반면 놀랍게도 화를 내는 분들이 있다. 나름 이유는 있다. 이빨도 시원치 않은데 깍두기를 준다고, 싫어하는 음식이라고, 조금 준다고, 많이 준다고… 화(혹은 투정)가 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분의 치아상태가 어떤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식사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는 입장에서는 황당할 따름이다. 한가지 진리만은 확실히 안다, 웃음은 웃음을 부르고 화는 화를 부른다는...

DC의 공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머어머… 나한테 막 화를 내, 라는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맡겨 놓은 걸 찾아가듯 막무가내인 사람과는 실갱이도 벌어진다(대부분 노숙자가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눈으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으로 땡큐를 말하는 분들을 만나면 뜻있는 선물을 주고받은 듯 함께 웃는다. 우리는 맛있게 드세요, 하고 또 웃는다. 그런 분들에게는 뭐 하나라도 더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웃음을 주어서 감사하고 고마운 것이다. 혹시 신도 그러시지 않을까, 좁은 사견으로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들에게 복을 내린다는 논리는 그렇게 이해되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미소를 짓거나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너무 소박한 마음일지 모르지만 행복은 그렇게 웃는 것이 아닐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므로 기쁨은 각각의 이유로 찾아오겠지만 행복을 느끼면 누구나 순하고 환하게 웃는다. 소유나 행색과는 상관없이 평온하고 온화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흔히 재력이 곧 행복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진리를 믿는다. 그분들을 만난 덕분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인생이 아니라 세 종류의 인생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행복한 사람, 돈은 있지만 불행한 사람, 돈 없이 불행한 사람.

돈이 있든/ 없든 행복한 사람은 이미 가질 것 다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평안하게 웃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