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한 여름에 닥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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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가면 6차선 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를 건너 30여 미터만 직진하면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푸른 바다는 거기에 있었다. 제풀에 신난 바람이 사정없이 내 몸을 밀어내더라도 까딱 없이 10분이면 파도와 갈매기가 파닥대는 그 곳에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10분 거리의 바다가 요원해 보였다.

택시에서 내려 인도로 올라서려니 높은 단층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오른 발을 먼저 내딛고 왼발을 올리면 간단하게 보도블럭을 밟을 수 있게 된다. 이후 목적지인 호텔 안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턱이 절벽만큼 날카롭게 느껴져 결국 오르지 못했다. 그리하여 턱을 없앤 곳까지 10여미터를 걸어 내려가 다시 10여 미터를 되돌아 왔다.

물건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일도 축복임을 알았다. 양손으로 목발을 짚어야 걸을 수 있는 사람한테 크고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옮기는 일이란 하늘을 나는 일처럼 허황된 꿈…… .

난생 처음 휠체어가 인류에게 고마운 발명품임을 가슴으로 느꼈다. 엘리베이터와 의자와 엉덩이 높이의 침대도 알고보니 꽤 사려 깊은 문명의 이기였다. 목발, 통증을 감해주는 약과 연고, 기부스랑 의사도… 세상엔 멀쩡할 땐 무감각하나 깊이 들여다보면 고마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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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둘이서 바다가 있는 곳에 왔다. 남편은 해외출장을 갔다. 2017년 7월, 한국은 묵직한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가며 사람들을 괴롭혔다. 미세먼지와 오존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고 지구가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한 건 누구의 탓인지를 거듭 생각하게 만들었다. 집 안에서는 바람 한 점 없는 공기를 선풍기와 공기청정기로 흔들어 놓은 덕에 화분들이 잎새와 줄기를 무성하게 키웠다. 온실이 따로 없었다. 온실은 식물에게는 좋을 지 몰라도 사람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무기력은 싫고 바다가 좋았다. 그러니 (온실에서 나와) 바다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춘기 딸과 가방을 꾸려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기 전에 또 한바탕 폭우가 쏟아졌다. 우산을 썼는데 머리에만 비가 닿지 않았다. 가방을 멘 덕에 등은 젖지 않았다. 대신 가방이 비를 뒤집어 썼고 속옷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만큼은 우산도 주인을 닮아 무기력증에 빠졌다.

달리는 차창 밖의 한반도는 물항아리 같았다. 하늘의 물을 받아내는 항아리땅, 한반도는 곳곳이 젖었고 계속 출렁였다. 다행히 바다가 있는 남쪽 땅에는 폭우가 내리지 않았다. 이틀 동안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모래밭엔 운치가 있었다. 모래는 버터를 섞어놓은 황설탕 같았다. 자리를 깔고 누우니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다 바다 덕이었다. 이틀째 밤이 되었을 때 나는 직감했다. 공기가 적당히 말라 있었고 바람이 정갈했다. 그래서 다음 날 맑은 하늘이 펼쳐질 것을 예감했다.

다음날 아침, 하늘이 푸르딩딩했다. 해는 세상을 부리부리하게 만들었고 모래는 버터끼 없앤 황설탕이 되었다. 솔직히 바람 없는 바다는 심심한데 바람마저 불어댔다. 우리는 우산 대신 양산을 들었고 자꾸 뒤집어 지는 양산을 보고 깔깔거렸다. 축축했던 돗자리가 하늘을 나는 양탄자처럼 펄럭거리면서 뜨거운 볕에 바짝 말라갔다. 썬크림을 발라 찐득한 얼굴과 머리카락에 황설탕보다 달콤한 모래가 들러붙었다. 담청색 하늘과 비릿한 공기와 날뛰는 파도때문에 기분이 째지게 좋았다. 딸아이는 바람에 밀려온 공을 혼자 차고 놀았는데 그닥 신나 보이지 않았다. 딸아이의 기분도 째지게 좋게 해주고 싶어서 그대로 누워 정처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싶은 욕망을 모성으로 짓누르고 정말 단지 딸을 위해서 뜨거운 모래바닥을 맨발로 딛고 일어섰다. 딸아이의 기분이 째지게 좋아졌다. 잠시 동안 공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바닥이 금새 홧홧해졌다. 파도를 향해 돌진한 것은 본능의 움직임이었다. 젖은 모래를 밟자 발바닥이 식었다. 모든 순간이 너무 신나고 행복했다. 파란 하늘, 맑은 공기, 발랄한 파도만 있으면 나는 행복해 죽는다. 파도가 뒤로 물러설 때 드러나는 젖은 모래는 시원하고 부드럽고 은밀한 속살이다. 그 속살을 더 깊게 밟고 돌아오는 놀이는 파도와 내가 벌이는 쟁탈전이다. 나는 더 깊게 침입하려 하고 파도는 침입자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번에도 역시 파도가 밀려간 틈을 이용해 재빨리 속살 속으로 파고든다. 화들짝 놀란 파도가 나를 덮치려 했다. 나는 급히 방향을 틀어 도망을 치려한다. 몸통이 먼저 돌아가고 짧고 무거운 다리도 곧이어 180도 회전을 시도한다. 그런데… 순간 종아리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찌된 일인지 내 오른 다리는 꼼싹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