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한국에서 속다니...

4년 전, 한국에 온 지 두 달쯤 되었을 때다. 미국시민권을 가진 나는 한국에서 거주하기위해 거소증이라는 것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관할 출입국관리소에 갔는데 넓은 대기실에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바글거렸다. 대기표를 받아보니 앞에 40여명이나 있었다. 미국 살 때 한국에 많은 동남아노동자들이 있고 차별을 받는다는 뉴스를 접하곤 했는데 2000년 이전과 비교하면 정말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있었다.

빠르게 변모하는 한국에 14년만에 돌아와, 그것도 처음 해보는 외국인등록인지라 어리둥절하고 절차를 모르기는 그들 못지 않았지만 천상 한국인 외모에 한국어가 능통한 내가 외국인만 모이는 그곳에 볼 일이 있다는 사실이 문득 야릇하고 의아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외국인인가? 나는 분명 한국인이었는데…‘ 나는 아직도 한국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국적이 미국으로 바뀐 관계로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세계가 얼마나 법과 규정과 규칙으로 체계화되어 있는 지를 알려주는 극적인 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은 14년만에 살기 시작한 한국도 낯선데 한국인이 아닌 내 자신도 낯설고,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외국인의 신분으로 대기하는 상황도 적나라하게 낯설었다.

이런 낯선 생각을 하는 동안 줄기차게 시간은 흘러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증명사진과 미국시민증서와 작성한 서류… 등을 들고 제복을 입은 여직원 앞으로 갔다. 친절한 여직원과는 복잡한 듯 보이는 절차를 무사히 끝냈다. 그리고 맨 왼쪽에 있는 남직원한테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남자직원은 거소증이 나오려면 2주 가량 걸리지만 내겐 특별히 당일 등록번호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친절을 베푸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자기한테 현금으로 만원을 내고 뒤쪽으로 가서 인지대를 따로 지불하라고 했다. 만원을 별도로 내는 것이 이상해서 뒤에서 한꺼번에 지불하면 안 되냐고 문의했을 때 그는 별 설명없이 만원은 여기서 내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 ‘별 설명없이’가 모든 일의 근원이 되었다.

이 경험 때문에 나는 또 한 차례, 두가지 타입의 지불을 한 자리에서 했다. 미국에서 차가 도착해 신규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였다. 미리 예약을 하고 왔어야 했지만 멀리서 왔으니 그냥 해주겠다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직원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였다. 만면에 웃음을 띈 여직원이 5만원은 현금으로 내고 131,000원은 카드로 결제를 해도 된다고 했다. 그때 내게 현금이 넉넉히 있어서 모두 현금으로 내도 상관없다고 하니 여직원이 다른 직원과 눈을 맞추며 웃고 나서는 그럼 12만원만 내라고 했다. 나는 눈치랄까 센스랄까 촉이랄까, 그런 것이 무척 발달해 있어서 누군가 조금 이상한 눈치를 보이면 금방 알아차린다. 이해가 안 되면 질문을 하고 그 과정에서 진위파악도 잘한다. 나를 속이는 일은 내가 일부러 눈감아주지 않는 한 드문 일인데 그 상황이 확실히 야릇했지만 출입국관리소에서의 경험이 있어서 순순히 그들의 요구대로 했다. 법정수수료를 깎아주는 것도 이상했고 나중에 확인한 영수증에 12만원만 적혀 있는 것도 이상했으나 한국에서의 그 모든 낯선 것들에 눌려 그 일은 곧 잊혀졌다.

살다 보면 굳이 기억하려 하지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어떤 일이 무심코 떠오를 때가 있다. 범상치 않았거나, 속상했거나, 인상적이었던 일련의 일들이 장기기억장치로 넘어가서 고이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연결고리로 인해 불쑥 튀어나오는 일 말이다. 한국 사회를 어느 정도 알게 되고 관행이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충분히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불현듯 위의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아마도 뉴스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고발을 보았을 때 일 것이다. 마침 이웃에 고위경찰관 부인이 있어서 말해보았는데 별 반응이 없어서 경찰서에 직접 민원제기를 하러 가야지… 생각만 하다가 잊었고, 또 고달픈 외국인들을 접하면 그 일이 떠올랐다. 본디 한국인에다 한국어가 능통하고 촉이 발달한 내가 속을 정도면 언어와 문화가 낯선 외국인들은 얼마나 쉽게 속아넘어가겠는가. 그런 생각이 마음 한 곳에서 연기를 피워올려 의식 한 쪽이 늘 매케했다.

어느 볕 좋은 날, 두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던 하루처럼, 나는 불현듯 몸을 일으켜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은 ‘별 설명없이’ 내라 했던 만원이 정당한 수수료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웹서핑을 했다. 어디에도 만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래서 1345(외국인종합안내센터)에 전화를 했다. 은미(가명) 씨는 매우 상냥하고 인간적이며 오지랖 넓은 상담원이었고 나는 그녀의 오지랖 넓은 호기심때문에 4년 전 ‘별 설명을 못 듣고’ 냈던 만원의 이야기를 꾸역꾸역 하고 말았다. 은미 씨는 요즘도 그런 공무원이 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고 믿기지 않아서 전화기에서 침이 튀어나올 것처럼 열변을 토했다. 나는 그녀의 열변을 들으며 번지는 미소를 갈무리하지 못한 채 속으로 생각했다. 이 처자, 내 과네!

은미 씨 덕에 알게 된 국민신문고. 큰 북을 둥둥 울리며 천하에 부정한 일을 고발할 수 있게 된 기쁨으로 신문고를 살피고 있는데 은미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먼저 자신이 오지랖이 넓다는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일이 커져서 그 공무원이 직장을 잃으면 가족들이 곤란해지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자신의 우려를 표명했다. 이 젊은 처자, 정말 내 과네… 나는 그녀에 대한 동류의식을 물씬 느끼며 이 나이쯤 되니 알 수 있게 된 사회의 생태를 설명해주었다. 그 사람이 몇 번의 고발을 당해 최종 경고의 입장에 처해있지 않는 한 한번의 고발로 명확한 증거도 없이 그런 일까지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당연히 발뺌을 할 것이고 그러면 내 고발은 헛수고가 되겠지만 이 일로 인해 경각심을 느끼고 앞으로라도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에 상습적으로 나쁜 짓을 해왔다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고 정당한 공익과 사익이 대치되는 상황에서는 공익을 위하는 것이 나은 결정이라 생각한다고 말하자 은미 씨는 내 말에 동의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은미 씨의 전화를 받았을 적엔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서 교통안전공단 자동차검사부에 문의를 마치고 5만원의 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였다. 조금 다급하고 들뜬 목소리의 은미 씨는 만원은 인지대와 별도로 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조폐공사에 내는 수수료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는 3만원이라 뜬금없는 ‘만원’ 소리에 자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데 4년 전에는 만원이었고 카드는 수수료 때문에 현금으로만 받는다고 설명하면서, 관할 출입국관리소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게 할 테니 확인을 해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하는 은미 씨에게 절대 괜찮고 은미 씨 말대로라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은미 씨 말은 맞았다. 그런데 현금 비리가 있곤 해서 현재는 은행에 직접 납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바삐 걸려온 전화, 내가 현금으로 5만원을 따로 냈던 곳에서 전화가 왔다. 교통안전공단 상담원이 기록을 꼬치꼬치 캐묻는 내게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고선 직접 그곳에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전화 속 남자의 목소리가 편안하지 않았다. 4년 전에 근무했던 당사자에게 상황을 물어보고 재차 나와 통화를 시도하면서 변명을 했지만 기록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자 지금은 매우 청렴하게 운영이 되고 있고 경각심을 가지라는 뜻을 잘 알겠으며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볕 좋은 하루는 지나갔다. 종일 혼자서 컴퓨터와 전화기를 붙들고 보낸 시간이었지만 마음이 허하진 않았다. 국민신문고에는 올릴 생각이다. 익명의 전화 한 통으로 바뀔 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해 행동하지 않는 건 동조나 마찬가지고 제대로 된 사회에서는 작은 외침이 큰 파도로 물결칠 수 있다는 사실을 4년동안 한국이 보여주었기에 내일 흐를 맑은 강을 기대하며 나는 그제서야 마음 한 켠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던 불씨를 비벼 껐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저녁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