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이런 내가 참 좋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야리꾸리한 냄새가 났다. 엥? 고개를 갸웃하며 수건에 코를 갖다 댄다. 역시… 쿰쿰하고 꼬릿한 냄새는 거기가 진원지였다. 얼굴 닦는 수건에서 왜 이런 냄새가 나야 하는지 의아했지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세수수건들을 빨래 삶기에 총출동 시킨다. 여름 이후엔 삶지 않았으니 이제 한 번쯤 삶아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큰 들통에 비눗물을 채우고 수건을 또아리 틀어 침잠시킨다. 뽀송했던 몸피가 순식간에 젖어든다. 들통의 가운데와 가장자리에 틈이 있도록 빨래를 쌓아야 비눗물이 위에까지 도달한다. 한국에 와서 늘은 솜씨 중에 하나가 빨래 삶는 기술이다. 미국 사는 14년 동안 속옷이나 수건을 삶을 필요가 없었던 건 건조기와 에어컨 덕이었다. 속옷이나 양말들을 일일이 널지 않아도 되고 수건에서 세균이 자라는 걸 방지해 주는 건조기는 참 감사한 생활의 이기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건조기를 사용하더라도 장마철엔 어쩔수 없이 삶아야 한다. 화장실에 에어컨 바람이 나오지 않아서 축축한 채로 오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세균이 자라는 모양이다.
여름엔 습기 때문이라지만 이 겨울에 웬일일까? 유독 그 수건에서만 퀘퀘한 냄새가 나는 이유는 뭘까?… 손놀림만큼이나 재게 머리를 회전시킨다. 범인은 아무래도 남편 같았다. 역시나! 남편이 사무실에서 묵혀서 쓰고 또 쓰던 수건이란다. 대체 한 수건으로 얼마나 쓰느냐고 물었더니 쓰다가 냄새가 나면 가져온단다. 오우, 노우!! 남편의 후각 기능은 정말 엉터리인걸… 그 후각이 인지할 정도면 상태가 어떨지 안 봐도 뻔했다. 앞으로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 수건을 지정해주고 교체할 기간도 정해준다. 덕분에 남편의 비위생이 수정되고 간만에 수건도 삶아서 좋지 않느냐고 나는 또 자족한다.
음식 할 때처럼 빨래를 삶을 때도 옆에서 어슬렁거리며 불조절을 해야 일을 망치지 않는 법인데 딴 짓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차 싶어 달려와보니 비눗물은 레인지까지 삶아낼 양 넘쳐 뜨거운 바다를 이루었다. 허연 비눗물이 싱크 표면을 타고 밑에 있는 서랍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머피의 법칙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얼결에 확인한답시고 서랍을 열어버렸고 덕분에 정중앙으로 비눗물이 빠르게 투하되었다. 아… 그 넓은 서랍 안에 나란히 누워있는 수저와 포크와 국자와 거품기와 온갖 집기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말았으니… 일단 심호흡을 몇 번 한다. 그렇게 들숨과 날숨을 들이고 내는 동안 심장은 얌전해졌다. 손은 이미 레인지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많은 집기들을 싱크볼에 쏟아 넣는다. 하나씩 닦는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일도 언젠간 끝이 난다.
너희들, 햇볕 좀 쐬어 볼래? 말갛게 세수한 온갖 집기들을 베란다로 가져간다. 옹기종기 일광욕을 시작한 집기에서 반짝 빛이 난다. 레인지를 본다. 유독 그것 청소를 싫어해서 기름때로 끈적이던 레인지는 목욕재계한 새신랑 같았다. 이젠 삶아진 빨래를 처리할 차례! 빨래판에 대고 으쌰으쌰 비벼서 초벌을 헹궈 세탁기에 넣고 헹굼코스를 누른다. 드럼은 언제나처럼 신나게 돌아간다.
하아~ 가사일을 필요악으로 여기는 나(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냄새 나는 수건이 꼬아놓은 긴 하루를 잘 풀어냈다. 문득 행복감이 밀려온다. 투덜대지 않는 입…
그 입을 가진 내가 ‘새삼’ 보여서,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고 즉각 좋은 결과를 위해 행동하는 내가 보여서, 한 점 거짓없이 평온하게 마음을 부리는 내가 보여서, 이런 내가 참 좋다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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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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