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첫날
드디어 D-day,
이민가방 6개, 기내용
가방 5개, 강아지 캐리어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세식구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직항 국적기 말고 캐나다를 경유하는 캐나다항공사를 택한
이유는 당연히 경비절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싼 티켓을 끊었다는 이유로 예기치 않은 문제에 봉착했다.
항공사 직원말로는 미국 여권을 가진 나와 막내는 괜찮은데 한국국적인 남편이 캐나다를 경유해 미국으로 가는 경우, 캐나다 방문 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6시까지 신청할 수 있는데
그때 시각이 5시 20분.
보통은 바로 허가가 나오는데 경우에 따라 최대 이틀이 소요될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다. [참고: 나중에 알아보니 비자가 아니라 전자여행허가서(eTA)였는데 캐나다는
미국(ESTA from2009년)에 이어 2016년 3월부터 비자가 필요 없는 국가의 국민들에게 eTA 발부를 시행하고 있었다] 남편은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휴대폰 액정을
터치하며 웹사이트를 통해 부랴부랴 eTA를 신청했다. 다행히
마감 10분 전에 승인이 떨어져서 짐을 부치고 잠시 기다리는데 이번엔 가방검역소에서 호출이 왔다. 어딘가에 막내가 넣어둔 보조배터리가 있었던 것이다. 동물검역소와
출발 직전 eTA 신청, 가방검역소까지 두루 섭렵한 특별한
체크인을 마치고 임박한 탑승마감시간에 맞추느라 세식구는 5개의 가방과 강아지 캐리어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마구마구 뛰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땅을 밟았다.
미국에 오자
먼저 water fountain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보자 아, 미국에 왔구나,
란 감상이 일었다. 거꾸로 정수기를 보면 한국에 있다는 실감이 날 것이다. 대기실 의자가 높고 공중 화장실 칸이 넓었다. 곳곳에서 영어가 들리고
사람들의 살빛이 까맣거나 하얬지만 이상하게 음수대와 의자와 화장실이 미국에 왔다는 확신을 주었다.
미리 크레딧 조사를 의뢰해 입주승낙이 떨어진 아파트에서 창문이 많고 햇볕이 좋은 유닛을 골라 계약을 했다. 걸을 때면 출렁이는 누런 카펫, 나무 문양의 싸구려 모노륨이 깔린
부엌과 욕실, 높은 싱크와 우리에겐 쓸데없이 넓은 욕조, 벽지가
아닌 페인트, 열쇠로 여는 현관잠금장치, 힘겹게 아래에서
위로 밀어올려야 열리는 창문, 엄청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환기구… 겉모습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내부의 질이 떨어지는 이 아파트의 렌트비가 더 터무니 없게 느껴져서 문득 한국 생각이 났다. 그
돈이면 천안이나 대전에서는 삐까번쩍한 아파트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메릴랜드의 집값은 억지스럽게 비쌌지만
겨울임에도 한국의 늦가을 같은 정취와 맑고 푸른 하늘과 뽀송한 흰구름이 억울한 기분을 끌어내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 시즌 덕에 밤 늦게까지 여는 백화점에 들러 급한대로 이불 두개를 사서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었다. 가운데 내가 눕고 왼쪽엔 남편이 오른쪽엔 막내가 그리고 그 옆에 우리 로우지가 누웠다. 달빛에 닿은 하얀 털이 곧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걸 보니 깊은 잠 속에 들었나 보다. 알라스카를 가로질러 캐나다에 들렀다가 미국까지 온 줄도 모르고… 17시간
동안 좁은 캐리어 안에서 곁에 엄마와 아빠와 언니가 함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던 로우지… 그러고 보니
세식구가 아니라 네식구가 미국에 왔다. 곧 있으면 큰애도 메릴랜드로 온다. 그러면 우리는 꽤 오랜만에 식구 다섯이 함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긴 여정에 지친 식구들이 모두 잠에 든 맑은 밤, 나는 로우지에게
이렇게 소근거렸다. 로우지야 여기 미국이야…
12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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