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있는 빵집에 구인광고가 붙었다. 알바생을 모집하는데 주부환영, 일하는 시간은 오전타임이라기에 대뜸 들어가 면접을 보았다. 다행히 사장님이 매우 좋은 분이셨고 나를 마음에 들어하셔서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당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었으면 하던 참이었다. 한국에 와서 집을 사면서 은행에 큰 빚이 생겼고 큰 아이가 대학을 진학하면서 이래저래 경제적 부담이 늘었고, 무엇보다 큰 이유는 하루에 몇 시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고 싶었다. 나는 어렸을 때 레코드가게 점원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골라 들을 수 있고 또 손님에게 서비스를 하는 일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레코드가게 점원이 더 좋지만(슬프게도 사장된 산업…ㅠㅠ) 빵집 알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가깝고 고소한 빵냄새를 맡으면서 이런저런 손님들과 가끔은 색다른 수다를 떨 수도 있을 거란 기대에 마치 고대하던 직장에 합격한 듯 행복을 느꼈다.

사실 나는 한국으로 오기 직전에 예정에 없던 미국시민권을 부랴부랴 땄다. 대학진학을 앞둔 큰아이에게 시민권을 주기위해서였다. 큰아이는 의대를 가고싶어했는데 혹시라도 모르니 시민권을 갖게 해주라는 인생 선배님들의 충고를 간과할 수 없었다. 앞으로 딸아이의 미래에 그것이 보탬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당시로서는 딸아이의 장래를 위해 어떤 보험이라도 들어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가릴 바도 못 되었다. 한국을 사랑하고 그래서 제 자식에게 모국의 문화를 전하고 제대로 된 정체성을 심어주기 원했던 한 어미는 아이러니하게도 더이상 한국인이 아니었다. 이후 나는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이 아니어서 겪는 불편을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 주민등록등본도 자동판매기에서는 못 떼고, 원했던 일자리도 내국인에게만 해당되어 응시할 수 없었고, 또 인터넷 등록은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주민번호 대신 외국인등록번호가 생겼지만 어떨 땐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사정도 있고해서 내게는 제도권에서 벗어난 아르바이트 일자리에대한 갈구가 있었다.

그런데 안이했다. 세상엔 쉬운 일이 없는 것이다. 외우는 걸 끔찍이도 싫어해서 암기과목은 책뚜껑을 잘 열지 않았던 내 습성은 중고교를 떠난 지 30 여 년이 지났어도 무뎌지지 않았다. 빵이름이 줄줄이 펼쳐진 패널을 사진으로 찍어다가 집에서 외워오라는 말을 들었을 땐 세계사의 악몽이 고스란히 떠오르기도 했다. 백 가지?도 넘는 빵과 과자, 케이크와 샌드위치의 이름을 외워서 매치시켜야 하는 일도 마음 무거운 과제였지만 사람을 주로 대하고 싶었던 나는 사람보다는 빵을 대면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일에 흥이 안 났다. 혹 내가 제과제빵에 흥미를 가지거나 관심이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백 번 주장하지만 사람은 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 행복하다. 빵 먹기는 좋아하지만 빵 이름에는 관심이 없는 나는 한번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자 꼭 이 일을 해야하는지 의구심이 일었고, 그래도 성실은 하니 시간 내내 쉴 틈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는 임금이 노동력에 비해 너무 적다는 셈이 새록이 떠올랐다. 최저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겠다거나 하고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건 그 일을 기꺼워할 때의 마음가짐이었다. 그 마음이 바뀌고보니 일에 비해 대우가 부당하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나는 고작 3 일을 일하고 그 알바를 그만 두었다. 적어도 일을 하려면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만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이 좋던지 대우가 좋던지... 둘 다 아니라면 절실하게 그 돈이 아쉬워야 하는데 너무 소액이다 보니 차라리 지금껏 익숙한 내 삶의 방식인 '덜 쓰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장님께는 너무 죄송해서 3일 간의 페이도 안 받겠다 했지만 최저임금보다 낮은 연수생 임금이 있어서 그걸 받기로 했다.

그런데 고백하건데, 지금껏 나는 핑계만 댔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일을 그만 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건 백 개도 넘는 낮선 이름들을 외우는 과제를, 빵과 더불어 지내는 무감동한 시간을, 적은 임금을 품어줄 수도 있는…... 커다란 보자기의 부재였다. 그 보자기만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처음의 느낌처럼 행복하게 빵집 알바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 보자기란 따뜻하고 인간적인 동료애였다. 무언가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고, 사람에게 벽을 세우지 않고, 자신이 받고 싶은 대우를 타인에게 베풀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나는 3일만에 그 빵집문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딘가 그런 곳이 있다면 그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 발을 그렇게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