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에는 소파도 세탁기도 냉장고도 없이 안방에 침대만 덩그라니 있었다고 한다. 부인은 택배로 부쳐받은 짐을 한쪽 구석에 놓고 풀 생각도 못 한 채 친정을 오가며 빨래를 하고 끼니 때면 외식을 하면서 낯선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서 소파도 사야지, 냉장고랑 식탁도… 남편이 보챘지만 부인은 잠깐만요, 가만 있어봐요, 좀 있다가요… 라며 차일피일 살림 들이기를 미뤘다. 마음 속으로 일단 6개월을 버텨보자는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방학 때면 때때로 만났건만 두 부부의 새로운 시작에서 8년이라는 세월동안 떨어져 살았던 후유증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부인은 남편이 옆에서 자는 것이 불편하고 남편 앞에서 가슴팍을 여미기 바쁘며 노크 없이 방 문이 열리면 깜짝깜짝 놀라기 일수였다. 그것이 그렇다. 같은 현상이라도 신혼 때와는 여러 조건이 다른 것이다. 사랑의 온도가 다르고 알만큼 알아버린 상대에대한 호기심이 다르고 젊음과 함께 잃어버린 마음과 성격의 유연성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 신혼 때처럼 상대를 알아가면서 서로 맞춰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은 애저녁에 사라졌다. 신혼 때는 심장이 두근대지만 이제는 관자놀이가 두근댈 뿐이다.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지어온 부인이건만 사업을 하는 남편이 아무 때나 귀가해 밥 달라면 이게 뭐지? 내가 식모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입장은 부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밤시간이든 주말이든 자신이 원하고 내키는대로 시간을 자유롭게 보냈는데 이젠 꼬박꼬박 부인한테 연락을 해야하고 부인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스케줄을 조절해야 하는 일이 번거롭기도 불편하기도 했다. 씻고 싶을 때 씻고 자고 싶을 때 자는데 익숙해진 남편은 그런 일조차 규칙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새삼 거북했다. 남편의 귀가는 버릇처럼 늦었고 그렇게 침대로 들어오면 부인은 한밤중에 깨어나 잠을 설쳤다. 부인은 아이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어서, 아니 아이들과 떨어져 살지언정 오랜 친구가 있고 지난 8년동안 익숙해진 타국이 그리워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오랜동안 고민한 듯 이런 말을 꺼냈다. “나는 집에 당신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행복해져. 아침에 당신이 옆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봐도 그렇고 언제든 귀가하면 당신이 있다는 생각에 집에 돌아오는 일이 기분 좋은 일과가 되었지…” 그 말을 들은 부인은 며칠동안 열심히 웹서핑을 한 후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오늘 가구 사러 가요!”

8년 만에 재결합하는데 부부지간 관계가 어색하진 않더냐는 내 질문에 부인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오랜 시간 떨어져 살았던 부부라면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법한 일이지 않던가. 우리 부부만해도 비록 넉 달이지만 서로 떨어져 사는동안 느꼈던 마음 한 켠의 자유로움때문에 랑데뷰 후 한동안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싱글 라이프 패턴을 영입한 남편이 생경했고 그것을 한국화되었다고 표현했다. 살던 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여전히 가사일을 하는 내 입장과는 다르게 남편은 한국에 와서 끼니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한국엔 한식당이 깔렸지 않은가) 오히려 주위엔 옛친구들이 널렸고 육아나 가사일로부터 해방까지 되었으니 그 자유로움이란 상상만해도 휘파람이 나오지 않는가 ㅎㅎ. 가족이 그립기도 했겠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절절한 외로움은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남편의 행동거지가 이해가 간다. 이제는 거의 옛 패턴대로 살아가고 있으니(절대 100%는 아니지만 변화에 적응이 되어서인지 그런 느낌이다^^) 역시 가족은 같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한 덩어리로 매끄럽게 굴러간다. 그때 나는 기러기생활을 하면 부부사이가 멀어지겠고나, 나중에 결합을 하더라도 서로 불편하겠고나… 생각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부인의 스토리가 적나라하게 실감이 되었다.

비록 살림도 들여왔고 한국생활에도 익숙해졌지만 부인은 아직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살지 못한다. 대화가 없어도 편하려면 그만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 대화는 버릇같은 거라서 안 하던 사람과는 새삼 하기 힘들다. 대화를 할 기회도, 대화 없이 편할만큼 공유한 시간도 없어서 이 부부는 새 집에 새 가구만큼이나 상대의 냄새가 낯설다. 부인은 가끔 큰 아이에게 하소연을 한다. "엄마는 너희들 곁으로 다시 가고 싶어." 다 큰 아이는 대답한다. “아빠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 곁에 계셔 주세요. 엄마가 필요해서 아빠곁으로 가는 것보다 엄마가 더 행복해져요. 우리가 언제까지나 엄마 곁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하나가 된 엄마 아빠를 보면 우리는 정말 행복해요.” 그 이야기를 전해듣는 순간 나는 천만다행으로 부인이 이루어놓은 것을 보았다. 작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자라 제 앞가림 뿐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엄마를 위해 진심어린 조언도 해 줄만큼 성숙한 사고를 하는 것이다. 비록 부부를 위한 시간은 이제부터 쌓아야 하지만 부인이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 뚜렷이 보여서 내 마음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