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변함없이 장로님이 만드시고 권사님이 쓰신 아름답고 정성 가득한 카드를 받았어요. 하염없이 반가워 싱글거리며 저는 지금 동봉하신 사진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봅니다. 새로 태어난 세번째 손주, 은이가 어찌나 이쁜지요. 은이가 고생을 많이 했네요. 그 어린 것이 두 달이나 젖을 코로 먹어야 했다니요. 그렇게 체중을 불려 수술을 해야했다니 은이 부모님은 물론이고 권사님을 비롯 은이를 바라보는 주위의 많은 분들이 얼마나 마음으로 고생을 하셨을까……. . 그래도 이토록 야무지고 포동포동하고 건강하게 자라나 권사님께 함박웃음을 선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감사할 뿐입니다. 은이를 안고 계시는 권사님의 얼굴이 더없이 행복해 보여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고생이 많았던 며느리를 진정 가슴 아파하시는 권사님의 고운 마음때문에 활짝 지으신 미소가 더욱 반짝거려요.

비록 시작은 고난이었지만 마무리가 충만하고 감사하게 맺어진 2015년이라 참말 다행이에요. 이제 곧 이 해도 가버리는군요. 진짜 왜이리도 해가 빨리 바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청춘의 시절엔 새해가 오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는데요. 오히려 헌 것은 가고 새 것을 얻으니 반갑지 않았던가요. 조금 더 어른이 된다는 기쁨에 보신각종소리가 희망의 전율처럼 들렸는데요. 이젠 나이를 먹을만큼 먹어서 배가 부른데 또 먹으라니 꽉 찬 위장속이 버거워 이리 부담스러운가봐요. 소화도 되기 전에 무언가를 또 먹어야 하는 일은 즐겁지 안잖아요. 그러고보면 이제부터는 한 해를 잘 소화해 내는 일이 중요하겠어요. 가는 해가 아쉽지도 오는 해가 무겁지도 않게요. 열 두 달을 잘 다스리고 30일을 잘 건사하고 하루를 보람차게 보내는 일만이 새해를 기껍게 맞을 수 있는 비결일 듯 싶어요. 2016년 병신해에는 올 해 보다 하루하루를 더 알차게 살아야겠어요. 더 사랑하고 더 감사하고 더 충만하게...

권사님, 책만 좋아하시는 권사님이지만 혹시 '응답하라 1988'이란 드라마를 아시나요? 저희 식구는 요즈음 그 드라마에 빠져 방송을 볼 때마다 울고 웃느라 정신이 없어요. 남편은 무한도전 덕후인데 이 응답하라… 가 더 재미있대요. 그러니 안 보셨다면 한번 봐보세요. 장로님과 함께요. 1988년을 배경으로 그 해에 일어난 일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담은 소박한 에피소드에요. 연탄과 석유곤로, 한 골목에 사는 사람끼리 가족처럼 지내는 마을 공동체,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 순박한 사람들의 넘치는 정과 인심, 흐드러지는 부는 없지만 찢어지는 가난도 벗어난 삶, 진한 우정… 그 시절에 추억을 얹은 사람이라면 쏙 빠질 수 밖에 없는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요, 이 드라마를 1988년을 살아보지도 않은 막내로부터 소문을 듣고 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제 친구의 엄마는 펑펑 울기도 하고 아빠는 배꼽을 잡기도 했다나요. 아마도 온 오프 에어로 볼거리가 많은 드라마라 더우기 아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나봐요. 그러고보니 어쩌면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좋아할만한 정서와 분위기가 바로 그 시대의 풍토가 아니었을까… 저 역시 미국에서 그리워하던 한국이 바로 이 드라마 속에 들어있는 시대상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은 훨씬 삐까번쩍하고 세련되고 잘 살고 뭐든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빈 마음의 어딘가에서 자꾸 울리는 공명에 바로 1988 시절을 그리워하는 소리가 들어있다는 생각 말이지요. 그 땐, 참 좋았어요. 사람들이 따뜻하고 정겹고 안 계산하고 덜 경쟁하고…

그런데 말이죠, 제가 왜 갑자기 이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요, 이 1988의 정서가 권사님이 살고 계시는 그곳에는 아직도 살아 숨쉰다는 생각때문이에요. 왜 흔히들 그러잖아요. 70년대 도미한 분들은 70년대의 한국상을, 80년대에 도미한 분들은 80년대의 한국의 정서를 그대로 품은 채 살아간다구요. 비록 미국에서의 시간은 2016년을 앞두고 있지만 많은 어르신들이 멈춰진 한국의 시간을 간직하며 살고 계시면서 그 따스한 그늘에서 젊은 사람들을 품고 쉬게 하시니 70년대와 80년대와 90년대와 밀레니엄 시대가 섞여서 적절히 1988 정도의 모습으로 재현이 되는건 아닌지... 미국식 합리적인 매너가 한국의 정과 만나면 더할나위 없는 정서가 만들어지는 것을 저는 그곳을 떠난 후에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엔도버에서 보낸 시간은 생각만해도 따뜻해요. 그곳에서 만난 분들과의 인연은 하나같이 보배구요, 순수하고 사려깊고 정겹고 인간적이고 배려심 많은 분들이 그득한 그 곳, 권사님도 그 한 분 이시지요.

권사님의 은이가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날 수 있는 건 축복이에요. 건강하고 하염없이 깨끗하고 밝고 순수하게 자라주기를, 은이를 위해 이 아줌마가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수치의 세계에는 조금 못 미치더라도 마음은 늘 행복하고 입술은 감사의 미소를 띄며 손은 타인의 손을 맞잡을 수 있도록 비어있는 여인이 되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