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감기몸살엔 평시와 다른 행동을 취했다. 등골에서 번개처럼 한기가 번쩍거리고 편도선이 감기균에 잠식되었음을 감지하자마자 약을 먹어버렸다. 나로서는 드문 일이다. 감기쯤은 민간요법과 식이요법으로 다스렸고 그렇게 온 가족의 면역력을 키워놓았기에 우리집에는 감기가 드물게 찾아왔다가도 금방 떠나갔다. 은근히 몸의 면역력을 믿으며 버티며 살아왔지만 이젠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병을 이길 자신이 없으면 약을 먹어야 할 것이다. 내 몸은 와락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자궁내막증은 진작부터 지병으로 달고 살고 마흔 중반을 넘어서자 까딱하면 눈에서 눈물이 나고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온 피로가 눈으로 몰려와 붉은 족적을 남기기도 하려니와 작은 글자는 아예 뭉게져 보이고 큰 글자들도 아른거려 이제는 돋보기가 눈의 일부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기하게 저도 같이 기상을 해서 나를 화장실로 이끌고 변좌에 앉으면 몇 초 걸리지 않아 쾌변을 뱉어내던 대장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아랫배가 묵직하다는 느낌은, 아침에 나는 일어나는데 저는 일어나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않기 시작하면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배변습관이 변하는 건 대장의 위험신호라기에 웹사이트를 뒤적여보긴 했지만 내 특유의 안일주의와 낙천주의가 ‘장 속의 유산균이 조금 줄었나보지,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속닥대기에 그러려니 한 지도 두어달 지났다. 방광의 꼭지가 부실해지는 것도 하루가 달라서 화장실이 보이면 비워놓는 것이 마음에 평안을 준다. 여기까지는 서서히 진행된 증상이라 쇼크까지는 안 받았다. 그런데 저번 주에는 난데없이 어금니 한 쪽이 부셔졌다. 남들처럼 갈비를 뜯거나 오도독뼈를 씹다 생긴 일도 아니고 말캉한 배추김치를 씹는데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리기에 이물질이려니 하며 뱉어놨는데 식사를 끝내고 물로 입을 헹굴 때 보니 혀에 닿는 치아의 감촉이 낯설게 까끌거렸다. 어렸을 때 아말감으로 땜빵을 하고 크라운을 씌우지 않은 치아의 모서리이긴 하지만 그런 일은 처음이라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이젠 진짜 늙는구나… 머릿속에선 그 한가지 생각만이 가득차서 끓어넘쳤다. 그 일로 치과를 들락날락거리고 있는데 조금 무리를 했더니 금새 감기몸살 기운이 퍼졌다. 치아 일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약 안 먹고 버틸 오기가 살아있을 지도 모르겠다. 감기를 없애지는 못 하지만 덜 아프게 도와주는 약에게 조금씩 의지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그래서 들었다.

세월의 힘은 나를 노쇠하게 만들지만 세월의 힘은 또 어린애같은 막내의 몸을 피어나게도 했다. 내가 아픈 동안 아직도 상상놀이를 즐기고 삐죽하게 팔다리만 늘어난 밋밋한 막내의 자궁에서 첫생리가 시작되었다. 신기한 것이 막내는 곳곳에서 나의 면면을 엿보게 하는데 초경의 시기마저 내가 지나온 전철을 그대로 되밟는다. 35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두고 딸과 엄마의 인생은 그렇게 맞물려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매우 일찍 출산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딸아들들이 봄을 맞는 순간에 엄마(부모)들은 가을맞이를 한다. 아이들이 봄이슬과 햇볕을 머금고 활짝 피어나는 언저리에서 엄마들은 한껏 피었던 젊음을 접고 겸손해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봄만큼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가을의 풍광이다. 색과 느낌과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지만 분명히 가을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생생하고 풋풋하지는 않지만 성숙하고 풍요롭고 넉넉한 가을… 

작았던 딸이 여인의 길로 들어서는 이 세월의 흐름을 막을 힘은 없지만 자연의 순리는 아름다운 가을은 네 손에 달렸다고 속삭였다. 지는 꽃이 아니라 피는 단풍이 되는 일에 주력하면 정신건강엔 더 좋을 것이다. 나는 가을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같기만 하라는 그 가을같은 엄마... 마음도 풍성하고 지혜도 풍성하고 지략도 풍성하여 내 딸들이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고민이 있을 때도 조언이 필요할 때도 엄마의 그늘을 찾아 쉴 수 있도록 가을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몸은 노쇠해져도 마음만은 가을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