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등받이에 머리를 비비적대며 최대한 안락한 자세를 취하고 중간역에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걸 구경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내 옆으로 커다란 누렁이가 지나갔다. 까맣고 순진한 눈을 반짝이며 짤게 털을 깎은 긴 꼬리를 절도 있게 흔들었다. 이거 신나는군… 꼬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우고 위를 쳐다보니 누렁이의 목에 이어진 사각 손잡이를 잡은 한 젊은이가 까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 뒤엔 또 한마리의 누렁이와 검은 안경을 쓴 다른 남자가 서있었다. 무전기를 든 한 여인이 창가자리에 앉은 손님에게 검은 안경을 쓴 두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손님은 풍선처럼 일어섰다.

이야기를 바꿔서……

졸린 누렁이를 보니 문득 큰딸아이가 떠올랐다. 일주에 한 번은 화상통화를 하기로 해서 주말이면 세 식구가 모여앉아 큰 아이와 페이스타임을 시도했다. 큰아이는 저녁엔 친구들과 있다가 잠시 빠져나온 모습이고 아침엔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중이었으며 어떨 땐 연락이 닿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열리는 행사란 행사에는 모두 참여하는 듯 했고 한국인 학생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캠퍼스에서는 새로운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거대하게 만들고 보스턴 친구들은 물론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동아리와 봉사와 공부와 파트타임으로 일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바빴겠는가. 때문인지 우리와 통화를 하면서 심드렁한 표정일 때가 많았다. 그것이 서운하기도 하고 바쁜데 굳이 일주일마다 연락을 해야할까 해서 한동안 우리쪽에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3주 전부터는 제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 한참 바쁠 시간일텐데 왠일인가 했더니 첫 학기 때는 무언가 빠뜨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다 참여했지만 이젠 옥석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졸릴 땐 누렁이를 쓰다듬는 것이 사랑하는 방식이 아닌데 그걸 볼 수 없어서 젊은이가 안타까웠던 건 큰아이와의 그 일이 생각나서였다.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연락을 한다. 그러니 연락을 주면 좋지만 안 그렇더라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생각하련다. 집 생각 나서 우울한 것보다 바쁘고 활기찬 생활을 누리는 것이 잘 사는 증거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