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직히 휴가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맛으로 그 찐득한 여름을 견디어 냈다. 나이 탓인지 습하지 않은 대륙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탓인지 이번 여름은 한없이 몸이 쳐지고 식욕도 저하됐다. 그러면서 한가닥 희망을 summer vacation에 걸었다. 휴가지는 설악산과 경포대로 정했는데 어디로 갈 지에대해 분분하던 의견이 그리 낙점된 데에는 심금을 울리는 캐치프레이즈가 한 몫 했기 때문이다. '휴가는 국내에서…' 메르스로인한 외국인 여행객 감소가 가져온 불황을 내수로 극복해보자는 정부의 외침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애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지난 번 거제도행 때는 태풍 찬홈이 동반되시더니 이번 경포대행에는 태풍 고니가 우리와 함께 했다.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바다를 두고 해변에 한번 앉아보기는 커녕 하 그리워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우산은 두 손을 번쩍 들어 항복부터 하고 눈꺼풀을 때리는 비바람때문에 눈은 있지만 눈이 없는 듯 바다를 지긋이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여기까지는 작년에 썼다가 마무리를 짓지 않고 남겨둔 글이었다. 이 글을 읽는데 작년엔 정말 평온한 여름을 보냈다는 감회가 밀려왔다. 기껏해야 한가하게 날씨타령이나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 여름은 100 여년 만에 맞이하는 폭염, 기록적인 열대야, 8월 한 달동안 수도 없이 35도를 윗도는 기온을 염두에 두지 못할만큼 네 식구에게 골고루 이런저런 일이 터져서 내 머릿속과 마음은 48년만에 처음이라 할만큼 기록적인 폭탄밭이었다. 외부 기온보다 더 뜨거운 머릿속때문에 한반도의 폭염은 오히려 안중에도 없었으니 비교해보자면 작년은 엄살도 이만저만한 엄살이 아니었다.

사람이 큰 일을 당하면 작은 일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되는가보다. 본디 사소한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데 앞으론 더 담대해질 것 같으니 이도 인생사 새옹지마, 나쁜 일 끝에 좋은 배움이 있었다고 위로할 일이겠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마지막까지 미뤘던 네 식구 여름 휴가에서 전날까지 이글거리던 햇볕이 오간데 없어지고 태풍영향권으로 배가 뜨지 않아 모처럼 세웠던 계획이 현지에서 취소 되었지만 (막내는 학교 결석까지 하고 배시간 맞추느라 새벽부터 기차 타고 내려갔건만) 이게 별일인가란 생각이 드니 이리 살면 인간사 초탈한 신선 부럽지 않을 것 같다.

비바람에 우산을 받쳐 들고 눈 아래 펼쳐진 바다를 보는데 물이 매끄럽게 흐르지 못하고 자꾸 암석에 걸려 회오리가 일고 하얀 거품을 쏟아내는 모습이 인생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인생이야, 수많은 암석을 헤치고 넘어서 또 흘러가야 하는 게 인생이야. 멈추지 말고 물처럼 흘러가야해… 라고 얼결에 옆에 있는 막내에게 속삭였다. 그랬더니 녀석이 크크 웃으며 어머니 쬐께 유치하시와요. 그리고 저건 인생이 아니에요. 바위가 너무 많잖아요, 라며 내 어깨를 툭 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네 나이에 인생의 쓴 맛을 알면 얼마나 알랴… 엄마한테 반기를 들만큼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사는 막내가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