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계약기간이 끝나도 집세 올려달라는 야박한 소리를 안 들어도 되고 이젠 이사 갈 일 생각해서 나중에… 라고 살 것을 미루지 않아도 되고 이젠 거침없이 맘에 드는 커텐을 골라 달고, 이젠 걸고 싶은 액자가 있으면 못을 마음대로 박아도 된다(지금 사는 집에서는 투쟁끝에 5개까지만 박기로 했기에… ㅜㅜ).

아이들이 참 좋아한다. 막내는 진작부터 제 방의 테마를 정하고 웹서핑으로 인테리어 헌팅을 한다. 다이소라는 미국의 one dollar shop �w은 곳에서 소품을 구입할 꿈에 부풀어 있다. 해리포터 방처럼 꾸밀거래나 뭐래나… 아무래도 막내 방은 잡동사니로 하염없이 울긋불긋해질 것 같다.

우리집은 가구가 별로 없는 편이다. 가구뿐 아니라 그릇도 옷도 소품들도 별로 없다. 하지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오두막에 비하면 화려하고 화려하다. 사실 1년 전에는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 2개월여 동안 소로우씨처럼 산 적이 있다. 수저, 밥그릇과 국그릇이 각각 4개, 프라이팬, 냄비 1개, 방바닥이 식탁이고 1주일에 한번씩 빨래방에 갔다. 하루 이틀은 영 불편했으나 곧 그 생활이 익숙해졌고, 월든폰드의 한 대목처럼, 기찻길에 놓인 나무연장통?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서 기거하며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며 살아도 되겠다던 소로우씨의 낭만도 와닿았다. 간편의 미학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삿짐이 들어오고보니 이는 또 이거다 싶었다. 이번엔 편리함의 미학이었다^^ 간사함인가, 환경적응력인가… 허나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집이란 인간의 기본 3대 욕구중 하나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건 백 번을 강조하지만 그 안에 행복과 평안이 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새로 이사가는 우리집은 벽이 창문이다. 일반 아파트가 아니라 주상복합 건물이라 그렇다. 지난 해, 분양 사무실에 마련된 샘플 하우스를 본 순간 나는 뿅 갔다. 그야말로 my dream house였던 것이다. 나는 사방이 유리로 된 벽에서 창 밖의 자연을 바라보며 생활하는 삶을 동경했다. 그 바라다 보이는 곳이 바다이면 좋겠고 산이라도 좋았다. 도시의 불빛도 좋겠지만 나는 자연의 풍경이 더 좋았다. 우리집 거실창으로는 반쯤 하늘에 걸린 산자락이 보인다. 창을 열면 초록 바람이 슝슝 날아든다. 가을엔 단풍물이 풀어질 터이고 겨울엔 눈꽃 가지가 춤을 출 것이다. 나는 이 집은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밑도 끝도 없는 육감에 생각을 맡기는 건 나답지 않지만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이 순간이어서 (시세 차익, 투자 가치 같은…) 다른 이유는 찾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이사준비를 셋업시켜놓고 보니 불현듯 3년 전 일이 떠올랐다. 밑의 집 아자씨의 꼬장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편할 날 없던 그 시절. 그래도 그 곳이 우리집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었는데 어느날 그 아자씨의 모략으로 날아든 evacuation letter를 받게 되었지… 편지에는 뉴잉글랜드의 12월 칼바람이 뜨겁게 묻어있었다. 편지에 놓인 evacuation이라는 글자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창 밖에는 틈틈이 흰 눈으로 박힌 밤비늘이 허옇게 번들대고 있었다. 그리곤 허망한 웃음이 흘렀는데, 거기엔 두가지 생각이 들어있었다. 살다보니 별 일을 다 겪는구나, 이 집은 진짜 우리 집이 아닌가보구나… 이후에는, 물론 모략이었기에 사실이 밝혀졌고 모략을 한 자와 당한자의 당당한 위치가 뒤바뀌었지만 이젠 그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수로 뭐 하나 떨어뜨렸을 때 깜짝 놀라는 내 딸들의 모습을 더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줘도 괜찮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서 그 곳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난 이후 차로 달리며 바라본 세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세상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집들이 있었다. 붉은 벽돌집, 회색빛 콘크리트집, 주황 이층집, 정원도 넓은 초록집…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집들이 있는데 왜 우리 가족이 살 집은 없는가… 뭐, 그런 한번도 해 본 적 없던 생각의 chaotic 속으로 빨려들어간 나는 한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랬더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그 안에서 우리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어찌하여 그는 정착한 일터를 빼앗겨야 하는가...

새로 입주가 시작되는 아파트 근처에 구둣방 컨테이너가 있다. 그곳이 넓은 인도를 2/3쯤 차지하고 있어서 통행에 불편을 준다. 이를 두고 몇몇 입주자들이 철거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오래 전 터를 잡고 그 터에서 생계를 일구어가던 한 사람과 그에 딸린 가족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아무리 조금만 양보하여 불편을 감수하고 인간적 도리를 베풀자고 외쳐도 귀를 막은 사람들은 제 앞만 바라봤다. 갈 곳이 없어진 자의 절박함 따위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이제 그 아저씨의 눈에선 농익은 홍시에서도 피가 흐를 것이다. 나는 끝까지 싸운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안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는 그런 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서히 벗겨지기를… 조금이라도 이 먹먹한 막이 벗겨지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사가는 기쁨과 노여움이 거듭 교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