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살림에 집이 커지니 소리에 공명이 생겼다. 전화 목소리도 울리고 저쪽에 있는 sister를 이쪽에서 부르는 sister의 고함소리도 왕왕댄다. 입에 쓰레기를 물고 도망가는 우리 로우지를 쫓아다니는 발걸음도 길어지고 필요한 물건을 찾으러 다니는 내 발자국도 많아졌다. 덕분에 다리살이 빠진다. 집에서 만보기를 차고 아이들과 씨름하며 겸사겸사 걷기운동을 한다했던 한 미국 엄마가 떠오른다. 그때 부럽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는데, 그런 미국집에 비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지만, 은근히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그러니 생뚱맞게 10여년 전의 일이 이리 생생하게 떠오르지…

산 새와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는 우리 거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일은 힐링이 된다. 세상은 온통 푸르르고 공기는 하염없이 해맑다. 동남향으로 면한 안방에서는 아침마다 햇살이 음흉한 남정네의 손길처럼 느물느물 얼굴을 더듬는다.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창밖에서는 반쯤 걸린 산자락 위로 뭉게뭉게 흰구름이 하늘을 훑고 간지럽게 바람타는 잎새들은 자지러지게 고요를 흩뜨린다. 그들의 즐거운 장난질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에서는 미소가 밀려나온다. 그리고 매번 이 아름다움을 건네신 창조주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결혼한 이후 우리 부부는 동네도 옮기고 나라도 바꾸고 주도 이동해 이사를 다녔는데 숫자를 헤아려보니 총 열 한번이나 되었다. 결혼생활 18년 동안 11번의 이사를 했으니 평균 일년 반마다 한번씩 옮겨다닌 셈이었다. 그 중 한 곳에서만 집을 사서 4년을 거주했으니 역시 집을 사면 안정을 덤으로 얻나 보다. 이사를 하면 힘들고 번거롭지만 좋은 점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불필요한 살림이 제거되고 너저분했던 구석구석이 정리된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서 다양한 사실을 깨닫고 적응력을 키우게도 된다. 우리집 살림이 적은 이유도 바로 잦은 이사때문이리라. 렌트한 집에서는 언제 또 이사갈 지 모르는데… 하면서 하나가 있으면 둘을 사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니 버려지는 것도 없고 낭비도 덜해서 많지 않은 수입임에도 결핍을 몰랐으니 이도 잦은 이사가 준 혜택일 터이다.

사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사에대한 상념이 떠올라서는 아니다. 식구들이 모두 나가서 고적해진 이 아침, 문득 너른 거실 한 가운데 동그마니 놓인 2인용 소파가 내 눈길을 사로잡은 때문이다. 소파는 추억에 젖은 조신하고 단정하고 아담한 처자처럼 물끄러미 노란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측 등받이 쿠션이 다정한 연인의 맞댄 어깨처럼 가운데로 기울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우리 막내가 자주 올라앉은 탓일테지만 그 모습이 마치 18년간 서로 의지하며 살 맞대고 살아온 우리 부부를 연상시켜서 기분이 묘해졌다. 소파 방석은 처음엔 탱탱하고 빵빵했었는데 이젠 세월을 품고 쪼글쪼글 내려앉았다. 그것이 내게 남의 일처럼 느껴질 리 없었다. 소파의 자태 안에는 우리 가족의 역사와 내 모습과 생의 순리가 들어 있었다. 처음엔 이 소파를 내 집 마련을 하기 전까지 임시로 사용하다가 집을 사면 아이들 방이나 가족실에 넣고 쓸 요량으로 선택했다. 그랬던 것이 무려 8년간이나 그것도 미국에서 한국까지 동행을 하고 급기야 새 집을 마련했어도 여전히 우리집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마루바닥을 기어가던 아침 햇살이 슬금거리며 소파 다리에서 또아리를 트는군... 그 위에는 낮은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쭈그려 누운 나와 내 종아리 아래로 남편이 앉아 있고 포근하고 너른 등받이에 올라앉은 우리 막내가 제 발을 아빠 어깨에 올렸다 내리며 장난을 친다. 때론 좁다고 구박도 받던 2인용 소파… 너에게 언제부턴가 감사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좁으니 좁은만큼 식구끼리 살을 맞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렇게 닿은 살갗을 통해 우리는 어떤 담요보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든든한 것이 사람의 체온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지. 오갈곳 없어진 날의 밤에도, 더욱 좁은 거실로 옮겨진 그 밤에도, 너는 그렇게 가족이 함께 있으면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지난한 세월을 겪고도 흔들리는 물살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 후에도 이젠 너른 거실에서 동그마니 작은 의자가 되었지만 지금의 네 모습이 결코 추레하지 않고 단아해서 나는 이 아침에 별스럽게 안도의 숨을 쉬며 너에게 감사함을 털어놓는구나.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 가족을 이고 지고 얹고 살아주려무나. 네 위에 놓인 추억을 지키며 나는 너와 함께 늙어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