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생강대추차를 끓이다
흙 위에 쏟아진 낙엽더미가 푹신거린다. 가을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산은 풍성한 허전함으로 가득하고…
몇 주 전만해도 초록밭이던 그곳에서 사람들은 밤과 도토리를 줍느라 까만 봉지를 달랑대면서 허리를 굽히고 연신 땅 위를 살피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톡 또르르 탁 따구르르 소리를 내며 도토리가 굴러다녔다. 다람쥐와 칩멍크만큼이나 사람들도 도토리를 탐했다. 다 도토리묵 때문이었다. 이제 도토리 나무는 숱빠진 머리통처럼 허하게 맨질댄다. 예전에 늦가을 즈음이면 나는 무 삶는 냄새를 맡곤 했다.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밍밍하지만 알싸하고 달척지근하지만 쾌쾌하고... 맛은 강하지 않은데 코 속을 솎아내는 듯한 냄새는 결코 나긋하지 않았다. 그 냄새를 맡고나면 곧 겨울이 찾아왔다. 아주 잠시 가슴이 싸해지는 냄새... 우울이라거나 쓸쓸이라는 감성이 아니라 추운 겨울을 맞는다는 불편함때문에 기껍지 않은 냄새였다. 맡고 나면 기운이 빠졌다.
지금 한반도는 햅쌀과 감과 고구마와 쭈글쭈글한 대추와 양토가 덕지덕지 묻은 생강으로 덮혀있다. 그리하여 나는 대추와 토종생강을 잔뜩 샀다. 생강을 낱낱하게 썰어서 대추를 넣고 차를 끓일 것이다. 생강의 매운맛인 진게론과 쇼가올이 감기를 치료하고 항산화작용을 하는데 거기에 대추를 섞으면 영양도 더하고 속을 편하게 해서 음용을 도울 것이다. 내가 생강을 사기 시작한 것은 주부 4년 차로 도미한 직후였다. 김치 깍두기를 담가먹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생강 없이 반찬을 잘도 만들어 먹었다. 생강은 내 음식에 파슬리 정도의 의미였다. 넣어도 그만 안 넣어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김치 깍두기는 달랐다. 생강 없는 김치와 깍두기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배추와 무를 살 때면 카트 한 켠에 생강을 잊지 않고 담았다. 생강은 식혜와 수정과를 만들 때도 필요했다. 식혜를 좋아하는데 사먹으려니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그 맛이 아니었다. 어떤 떡집에서는 건강식혜라는 미명하에 설탕 대신 꿀을 넣었다. 나는 건강식을 좋아하지만 꿀식혜는 정말 사양하고 싶었고 영원히 사양하겠다. 그건 식혜라고 부를 수 없는 제 3의 맛이다. 참다못해 할머니 식혜를 만들기로 했다. 겨울철, 살얼음이 동동 낀 식혜 독 안에 한자루 가득 썰린 생강무덤이 들어있어야 달콤맵싸한 할머니표 식혜가 탄생한다. 미국생강을 뭉텅뭉텅 썰어서 엿기름가루 우린 물에 넣고 밥솥에서 밥알 삭히는 동안 생강물도 함께 우려내어 설탕을 잔뜩 넣고 단맛을 돋우면 결코 같을 순 없지만 할머니표 생강식혜가 나왔다. 누군가는 내 식혜맛을 식혜와 수정과의 합체라고 평했다. 그 사람과 나의 조상은 다른 지역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내게 있어 진정한 식혜는 생강맛을 품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솔직히 식혜맛은 엿기름이 좌우한다. 신선하고 진한 엿기름가루가 없다면 맛있는 식혜를 기대할 수 없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속담이 있지만 설탕 대신 꿀이 대체될 수 없는 원리처럼 엿기름이 없으면 식혜는 어떤 원료로도 완성될 수 없다. 미국 살 때 세번째로 이사간 곳에서는 한국마켓에서 오래된 엿기름만 팔았다. 그래서 나는 식혜 만들기를 포기했다. 대신 계피와 흑설탕을 사다가 생강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함께 폭폭 끓여내 수정과를 만들었다. 곶감은 때에따라 넣을 때도 생략할 때도 있었다. 곶감도 무미건조하게 마른 것 투성이여서 수정과에 넣어도 별 맛의 차이를 몰랐다. 이웃에게 나눠주고도 남은 수정과는 냉동실에 얼려놨다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겨우내 홀짝홀짝 마시면 온 가족이 고뿔을 모르고 추위를 견뎠다. 이젠 천지에 신선하고 맛난 한국식재료가 널렸는데 만들어 먹을 생각이 들지 않으니 식혜는 시어머님이 주시고 수정과는 친정어머님이 주시기 때문이리라. 이는 한국 사는 또다른 혜택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국생강을 개량생강이라 부른다. 토종생강은 알이 작고 향이 짙은 반면 개량종은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알맹이가 매끈서걱심심하다. 역시 작은 고추가 매운법이다. 작은 한국이 지구상에서 지대로(제대로^^) 매운맛을 보여주며 살아가면 좋겠다.
엄마가 생강대추차 끓일 것을 어찌 알고 딸들이 재채기를 한다. 얼른 끓여 달달하고 얼얼한 생강대추차를 한 잔씩들 마시게 해야겠다. 조석으로 기온차가 격심한 계절의 이 길목은 아이들 기침소리와 생강차 끓이는 수중기와 버석거리며 밟히는 낙엽과 왠지 모를 쓸쓸함으로 모자이크 된다. 곧 무 삶는 냄새도 맡게 되겠지… 흰 눈이 떨어질 그 날도 멀지 않은 늦가을날에...
전주 한옥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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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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