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본 직업은 작곡가가 아닌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에 교향곡 제 1번과 여섯 곡의 현악 4중주를 작곡하기도 했지만 피아노를 기가막히게 연주하는 재주로 돈을 벌어 젊은 나이에 부자가 되었다. 그것은 4세 때부터 7세 때까지 집 안에 감금되어 피아노 연습만 한 이후에 얻은 슬픈 영광이었다. 이후로 정신착란에 시달리게 되니 그런 베토벤은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작품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술만큼 자식을 귀히 여겼다면 과연 지금의 베토벤은 존재할 것인가… 그것은 일어나지 않아서 모를 일아다. 허나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은 있다. 만약 그가 귀를 먹지 않았다면 작금의 시대에 악성(음악의 성인) 베토벤으로 존재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 예측을 뒷받침할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300년 전에는 레코딩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소름을 돋우고 영혼을 울리는 피아노 연주라해도 건반은 눌리는 순간 소리가 공중으로 날아간다. 자자한 그의 명성이라지만 피아니스트의 삶을 이어갔다면 아마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그의 이름은 잊혀졌을 것이다. 그에게 인생의 결정적인 기회는 종탑에서 흔들리는 종의 소리를 듣지 못함을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 그때까지 하늘은 청천벽력으로 천재를 담금질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는 6년간의 절망 속에서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게 된다. 하지만 결국 죽음 대신 심포니 no. 3(합창), 5(운명), 6(전원), 9(합창)을 탄생시킨다. 청각장애자가 된 이후 스승인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작풍에서 벗어난 베토벤만의 세계는 창작된 숫자는 적지만 굵게 자유와 비극을 담아 여러 시대를 넘어 줄기차게 피어난다. 비창, 템페스트, 월광 소나타… 특히 피아노 독주곡을 좋아하는 나는 춥지만 감미로운, 뜨겁지만 심장을 떨게 하는 선율을 들을 때마다 인생의 묘미는 어떤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베토벤의 인생 역전과 하이든의 유머, 그리고 모짜르트의 비극까지 재밌게 듣고 열강을 해준 강사에게 박수를 쳐주고 거리로 나온다. 길거리의 이런 저런 쇼윈도를 기웃거리다가 커텐집이 있기에 아직도 맨얼굴로 우리 가족을 환하게 내비치는 유리에 예쁜 옷을 입혀볼까, 생각하고 그 집 주인장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음에 든 커텐이 있어 값을 물어보니 우와~ 몇 주는 고민해야 결정할 수 있을 가격이다. 그리하여 빈 손으로 가게문을 나오지만 무언가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는 즐겁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일들이 허다하고 새로운 상식을 여는 일은 마치 부자가 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나는 또 바삐 걸음을 옮긴다. 40여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시청 부속건물인 봉서홀이다. 몇 백명을 수용하는 규모의 봉서홀에서는 갖가지 문화행사가 열린다. 대부분 무료다. 그 사실도 기쁘다. 15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은 문화행사의 도가니다. 클래식, 대중가요와 뮤지컬, 마을 축제와 강좌와 세미나… 그 스케줄만 잘 챙겨도 한 달 일정이 빡빡해질 수 있다. 참 먹고 살기 유해진 나라라는 인상을 그런데서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