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이든 한번 편해지면 불편한 것을 매우 불편해 한다. 편한 것에 맛을 들이면 예전엔 아무렇지 않았던 사항이 '불편함'이 되버리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3년여간 신혼생활을 했지만 14년동안 미국에서 전업주부생활을 했기에 주부로서는 거의 미국식 패턴을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겪어보니 미국은 가사노동에 합리적으로 발달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미국식 편리함에 길들여진 나는 한국식 불편함을 속속들이 파헤치게 되는데...

먼저, 미국에는 집집마다 싱크에 음식물 분쇄기가 있어서 냄새나는 음식찌꺼기를 작은 봉지에 넣어 모아둘 필요도 없고, 가끔 새기라도 하면 그 뒷처리를 할 필요도 없고, 그걸 들고 결코 향긋하지 않은 쓰레기 집하장을 들락거릴 필요도 없다. disposure를 몰랐다면 그러려니 했을 불편… 요즈음 내 생활에 있어서 고민거리중 하나다. 껍질이 큰 수박이나 메론 등을 먹을 때면 그래서 기쁨이 반감이 된다. 먹을 때는 모르나 먹고 나면 한숨이 나온다. 하수도가 좁고 구불구불한 몇몇 구도시를 빼면 한국에서도 분쇄기를 달아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하나 기기값도 비싸고 선뜻 검증되지 않은 일을 벌여 이웃에 피해(하수도 막힘)라도 주면 곤란해서 그냥 참고 산다.

미국은 완연한 입식생활이어서인지 바닥이 좀 지저분해도 그러려니 하고, 공기가 깨끗해서 까만 먼지가 없으니(?) 청소는 1,2주당 한 번뿐인 행사였다. 그런데 한국은 까만 먼지도 보이고 보일러가 돌아가는 따땃한 방바닥이 깨끗해야 제 맛이어서 청소가 daily basis가 된다. 게다가 바닥을 닦아야 하는 부담까지… 빨래는 어떻고... 세탁기 옆에 건조기가 있으니 빨래 다 됐어요,하는 삐리리 소리 들리면 탈탈 털고 쫙쫙 펴서 반듯하게 널고자시고 할 것 없이 뭉텅 집어다가 커다란 건조기 입에 퐁퐁 던져 넣으면 지절로 말려주고 펴주는 센스... 오후에 입을 옷을 오전에 세탁해도 무방하니 교복이나 체육복 빨래에 신경 같은 거 분산시키지 않고 살 수 있어서 좋았다. 제일 한숨이 나오는 일은 양말빨래이다. 한 바구니 쌓이면 빨아서 나란나란히 널어서 마르면 제 짝을 맞추어 개는 일이란… 또 말리기는 어떤데… 여름철 장마거나 날씨가 흐리면 수건에서는 정말 냄새가 풀풀풀풀 나고 겨울철 두꺼운 옷들은 3,4일 기다려야 입을 수 있다. (참고로 미국에서 가져온 전기 드라이기는 일반 아파트에서는 전기 공급용량 부족으로 사용하기 힘들다. 가스 드라이기는 사용이 용이하다 들었다)

이런 일들이 한국에서만 살았던 주부라면 느끼지 못 할 불편이겠지만 미국식 패턴에 젖은 주부에겐 too much work이 된다. 그렇다면 한국 주부들이 편해졌다는 일설은 왜 생겼는가. 그건 예전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일 것이다. 외식문화가 발달되어 손님접대도 밖에서 하고, 손 많이 가는 한국음식들 재고 다지고 볶지 않아도 쉽게 사먹을 수 있고, 김장 수고 덜 수 있게 절임배추도 팔고, 각종 특산물도 당일 배달 가능하고, 슈퍼 가서 살 물건들도 전화 한 통이면 해결이고… 즉 고금을 견주어 (특히 식생활이) 상대적으로 편해졌다는 말인 듯 싶다.

내가 한국에 오면서 기대했던 생활의 즐거움중 하나에는 '애들 라이드 없다!!’ 즉 내 시간이 많아진다!! 가 있었는데, 라이드를 대신해 이 많은 가사일이 짜잔,하고 끼어들어 멍군 장군을 하니, 특히 겨울철 눈둔덕 사이에 주차해놓고 1,2 시간 기다리는 일을 면할 수 있어서 좋지만, 비교해 보자면 차라리 주변 구경도 하고 차 안에서 책도 읽고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사색할 수 있는 그 편이 양반이었다. 이는 내가 가사일을 어지간히 싫어하는 탓도 있지만 추억이 아름다운 까닭도 있고 음식물 분쇄기와 빨래건조기와 입식 생활이 효율적이란 공식이 성립되는 이유도 있다. 주부가 가사노동에서 해방될수록 주부의 삶은 자신을 위한 투자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라는 생각, 너무도 당연한 진리인데, 나는 오늘 절절히 해본다. 비효율적인 양상은 효율적인 문물을 받아들여 그 장점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새해엔 그렇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