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7일 정오에는, 구리시에 소재한 카페 프렐류드에서 34년 전 ** 여중 1학년 10반이었던 우리들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었다. 담임선생님과 훗날 나의 담임이 되신 당시의 수학 선생님도 함께 하셨다. 갱년기 증상의 일환때문에 잠을 설치다가 늦잠을 잔 통에 20여분만에 튀쳐나간 내 모습, 예매해 둔 고속버스에 가까스로 올라타긴 했으나 슬슬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배뇨욕구를 물리치기 위해 (땅콩회항은 커녕 휴계소에 들르자고 명령따위 할 힘이 내겐 없으므로, 아니 어쩌면 나는 지각 있는 여성이므로) 1시간여동안 주술같은 마문을 외웠던 기행 , 이 사람 저 사람과 거울을 공유하며 끝내 딸에게서 빌린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치켜올린 공중화장실에서의 행위… 이것은 모두 다 그 약속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어둠이 진득하게 뭍은 터미날에서 10시 30분 차를 기다리며 약속에 대한 하염없는 상념에 빠졌다. 약속은 사회를 이루는 기틀이자 신념이자 구동력이다. 대통령직선제를 실시하는 한국,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일본,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 사회주의에 자유경제체제를 도입한 중국… 겨울은 춥고 봄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는 물에서 살고 태양은 항상 그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일련의 이런 현상들은 다 약속이다. 국가와 국민간의 약속, 국가와 국가간의 약속, 자연과의 약속, 하나님과의 약속… 생각해 보니 세상은 온통 약속으로 득실댔다. 약속은 지켜져야 제 맛이다. 만약 이 수많은 약속들이 한꺼번에 깨진다고 생각해 보라… 무질서한 연옥이 따로 없게 된다.

함께 점심을 하고 또 저녁까지 먹으면서 줄기차게 서로의 수다를 듣고 인생을 이야기 했던 10 시간… 그 10 여시간 위에 올려진 34 년 세월의 더께가 예기치 않게 무거웠기 때문일까, 내 고개는 힘 없어 어둠에 눌린 터미날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육중한 지구를 밟고 있는 내 발이 낯설었다. 만약 중력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 발은 이렇게 땅을 딛고 서 있지 못할 것이다. 낯선 약속. 혼인서약... 그 약속은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우며 격렬하게 지켜져야 할 약속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지켜주기로 하는 약속… 혼인과 동시에 깨뜨리라는 서약이 아닌데 어떤 남자들은 그러는가 보았다. 13,4세 소녀 때는 같은 공기를 숨쉬고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노래를 들었던 친구들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한 남자들을 만나 걸어온 자국은 나를 낯설고 침울하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잘 치장하고 제 인생에서 잘난 것 보이다가 집에 와서는 부부싸움을 하는 자리가 여자동창회라 들었건만 서로 상처 받고 애쓰며 살았던 속살을 내보이는 친구들은 34년 전처럼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였을 것이다, 그녀들의 지난 아픔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뉴스에서 신문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보았던 흔하디 흔한 사회현상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녀들만이 겪은 통증처럼 안쓰럽고 망연하고 산란했다.

헤어지고 난 지금은 사는 게 정말 좋아… 한 친구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별거를 했지만 다시 결합한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 친구는 당당하게 돌싱이 되었음을 밝혔다. 지난 고통을 담담히 뱉어내면서도 내내 미소가 담겨있던 그 얼굴… 그녀의 미소는 진짜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싸하다. 얼마나 생지옥이었으면 혼자가 되어서 그리 다행일까… 부디 가까운 어느날, 그녀 앞에 약속을 잘 지키는 한 남성이 나타나기를… 나는 어둠 속에서 진심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