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좋음, 영상 8 도라는 기상컨디션은 초봄에 어디론가 달릴만한 조건으로 충분했다. 그 말은 입김으로 녹여야 하는 손등이 없고, 후드를 뒤집어 썼다가 벗을 때 드러나는 눌린 머리통이 없고, 동전 떨어뜨린 사람처럼 걷게 되는 미끄러운 바닥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회는 찬스인데 신나게 달릴 밖에, 천안아산 고속도로를 서해안 고속도로를 그리고 군산에 깔린 중앙로를… 

처음부터 의도한 여행은 아니었다. 그저 황사와 낮은 온도에 휩싸였던 나날들 틈새에서 핀 봄 날, 미세먼지 좋음, 영상 8도라는 기상조건과 친절한 남편이 떠올린 군산이라는 지명이 열 먹은 마른 옥수수 알갱이처럼 하얗게 튀어올라 고소하고 아름다운 추억여행이라는 팝콘이 되어준 것…

군산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 2학년 2학기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달랑 1년간의 기억이 많은 추억을 만들어 놓지는 못했지만 1년 1년이 모여 긴 인생이 이어지니 달랑 1년이라고해서 무시해도 좋을 시간일 수는 없다. 시간의 개념, 공간의 개념, 인생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 경험했던 그 1년은 땅 되밟기를 통해 정겨운 감회를 주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과거의 유적을 퍼올려 주었다.

우리집은 백화수복이라는 양조장 옆에 있었어. 나는 군산초등학교에 다녔고… 양조장과 군산초등, 이 두가지 키워드로 남편은 40여년 전에 내가 살았던 동네를 찾아냈다. 나는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는 순간 머리 속 어딘가에 담겨있던 한 장면이 튀어나와 오버랩되는 바람에 가슴이 두둥, 뛰었다. 서울로 전학가던 날, 친구들과 선생님과 슬픈 인사를 마치고 엄마손을 잡고 걷다가 문득 뒤돌아 본 교정, 어쩌면 누군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불렀을 지도 그래서 뒤돌아 보았을 지도, 혹은 교문을 나서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한번 더 보고싶었을 지도 모를 그 순간, 내 눈에만 젖어있던 빨간색 벽돌건물과 동그랗게 아우러진 황토빛 운동장이 어쩌면 그리 변하지도 않고 그대로인지... 아스라히 여덟살 된 내가 학교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한 장면인데, 그 추억을 현실에서 재회하다니 그야말로 추억여행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을 그러안고 나는 물큰 감격에 젖어들었다. 학교생활보다는 아는 아주머니가 통학로에 퍼모스트?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내셨는데 오며가며 들리면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한 컵 가득 주셨던 기억이 더 뚜렷하다. 40 후반에 들어선 나는 이제 엄마 대신 남편의 손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 예전에 다녔던 통학길을 걷는다. 그 중간에는 신발가게도 있었는데 엄마가 권하는 앙증맞은 빨간색 부츠를 마다하고 발등 주위에 털이 부숭부숭 난 고무신형(군밤장수 아저씨형) 신발을 사서 신나게 신고 다녔던 기억도 있다. 분명 촌스럽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신발을 신고싶다는 욕구는 강렬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예쁜 옷을 골라주어도 이상하게 생긴 옷을 사겠다고 고집하는 딸들의 심로 역시 이 메카니즘인가 보다. 예쁘진 않지만 꼭 입어보고 싶은… 어릴 적 내 족적을 따라갔던 시간은 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려 깊은 행적이기도 했다.

우리집은 널찍한 도로변에 주르륵 늘어선 집 중 하나였는데 나무로 된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이만큼(1m 20 X 80cm 정도) 네모나게 생긴 신발벗는 공간이 있고 요만큼(바닥에서 50센티 정도의 높이) 위에 마루가 놓여 있었어… 방들이 나란나란히 있고 좁다란 복도가 이어지고… 어라? 근데 그건 일본식 가옥이잖아? 그러면 내가 일본식 주택에서 살았었던 거야?  나는 신기해서 내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알턱이 만무한 남편을 붙잡고 옛 집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확인했다. 그랬었구나… 집이 아프리카식이었대도 남미식이었대도 상관없는데 단지 내 과거에 색다른 경험을 했다는 차원에서 그 풍성함에 신이 났던 모양이다. 군산은 호남평야의 기름진 곡식을 일본으로 수탈해 가기에 알맞은 지리적 위치에 있었던 관계로 일찌기 일본인들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알고보니 우리집도 그 중 하나였고 몇몇 집들은 아직도 역사의 유물로서 보존되고 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양조장 자리를 기준으로 우리집은 이 즈음인가? 아니 저 즈음인가? 길치와 방향치인 나는 한없이 엇갈렸지만 어쨌거나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았고 모퉁이에는 구멍가게가 있었고 옆집에는 예쁜 멀티레이셜 여자애가 살았다는 기억은 명확하다. 보는 사람마다 머리를 쓰다듬고 가겟방에서 아이스케키를 사주고 싶었던 아이…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울 엄마랑 나도 참 이뻐라 했는데… 세상물정을 알게 되니 한국땅에서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지 모를 그 아이의 인생이 발아픈 자갈길로 점철되지 않았기를 빈다.

군산 우리집을 떠올릴 때면 항상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이 있다. 우리집 처마 아래서 이슬을 피해 잠을 자던 동냥아치 할머니에게 엄마가 따끈한 식사를 대접하던 모습… 동그란 반상에 김을 모락모락 내며 찰랑대던 국사발과 무덤같이 솟아오른 밥공기와 소복한 김치 종지를 담아 건네면 할머니는 고개를 연신 숙이고 또 숙이셨다. 나는 엄마한테 소곤소곤 이렇게 말했던 기억도 있다. 엄마, 우리 상에서 같이 드시자 하지… 그때 엄마가 어떤 대답을 했는 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할머니는 그렇게 가끔가다 들르셨고, 그러면 엄마는 항상 따뜻하고 배부른 식사를 건넸다. 내가 동냥아치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도 그런 엄마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란 생각...... 그 추억때문에 하게 되었다.

우연히 시작된 봄 날의 달리기를 마치고 새까매진 밤바닥을 되밟아 올 적에, 나는 이런 날을 대박난 날이라 부르면 알맞겠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되돌아가 어린 나를 남편과 함께 만나고, 소문난 단팥빵과 환상적인 짬뽕을 먹을 수 있어서도 좋았던 여행... 한국에서만 가능한 추억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