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귀국해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큰 딸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왜 이렇게 screwed 하게 만들었냐고 항의했다. 설움이 북받쳤는지 선홍빛 볼을 타고 검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딸아이는 아빠가 분발해서 미국에서 정착했어야 했다고 처음으로 가슴 아프게 원망을 내뱉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국어시간에 지문을 유창하게 못 읽는다며 놀림을 받고, 교실에서 도난사고를 당했던 무렵의 일이었다. 아빠는 아무 대답을 못 한 채 우는 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문득 ‘The Glass Castle'이 떠올랐다. 딸도 나도 읽은 책이라 적절한 예시가 될 듯 싶었다.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 하고 때로는 한밤중에 도망쳐야하는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의 부모는 꼬박꼬박 아이들을 챙겨서 달아났다. 먹을 것이 없어도, 잠 잘 곳이 불투명해도 그녀의 부모는 자식들을 져버리지 않고 어디서든 함께 무리지어 사는 자연의 철칙을 지켰다.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말해 주었다. 인생은 계획 대로만, 기대 대로만 유유히 흐르는 초침같은 것이 아님도 알려주었다. 그 날의 대화 이후 딸아이는 다시는 원망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생활에 박차를 가했다.

요즈음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후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미래의 계획을 요목조목 세워보는 버킷리스트는 참 요긴한 메모라는 생각이 든다. 큰 딸이 떠나는 9월 전까지 더 많은 한국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리스트를 짜는 것이 핵심이다. 딸아이는 2 년여 간의 알찬 한국생활을 마치고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하러 미국대학으로 떠난다. 생각해보면 그 때 screwed된 것은 딸아이의 인생이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이 그랬을 뿐이다. 밤이어야 하는데 낮이고 낮이었어야 하는데 밤이 되는, 풍습도 문화도 언어도 생판 다른 공간으로, 쏘아올려진 공처럼 뚝 떨어졌으니, 한동안 데굴데굴 구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도르륵 도르륵 구르다가 공은 언젠가 멈춘다. 그것을 정착 혹은 적응이라 부르자. 딸아이는 주어진 환경에 모질게 적응해냈고 이젠 계획대로 대학에 진학한다. 지금은 제 둥지를 틀기위해 나뭇가지를 주우러 떠날 딸에게 박수를 쳐줄 시간이다. 작은 봇짐 안에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싸서 여정길에 든든히 안겨줄 것이다. 마음 한 켠에 대학까지는 한국에서 다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지만 제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모국어인 영어 나라로 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므로 기껍게 보낼 채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