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태 그 남자에게 사랑은 변할 수 없는, 변해서는 안 되는 진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이 변했다고 믿은 건 그의 착각이었을 지 모른다. 그때 이영애는 사랑한다고 대답하진 않았지만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진위는 영화 말미에 밝혀진다. 확실한 것은 돌싱인 이영애는 유지태보다 세상을 조금 더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애의 사랑에는 감정이 숙주지만 현실의 사랑에는 돈이 숙주라는 사실을... 이 패러다임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40년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아마 이혼이라는 풍진을 겪은 이영애는 조금 더 속늙은 모양이다. 가족이라는 담 안에서 곱게 길러진 청년 유지태는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것이다. 나이테를 더 두르고 그 안에 옹이도 박혀야 성장을 하고 또 세상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화 말미에 이영애는 유지태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우리 같이 살까,하고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하지만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기위해 이영애는 천 번쯤 연습했을 지도 모른다. 말투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 속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 헤게모니는 유지태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유지태가 예전의 유지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그녀는 물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유지태의 삶 속에 옹이를 박아준 그녀는 그래서 나쁜 여자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성장시키는 사람은 나쁜 인간의 범주에 있었다가도 면죄부를 받는다.

그들의 어설픈 사랑만큼이나 안타까운 사랑이 여기에 또 있다. '5일의 마중'의 공리와 진도명이 그 주인공이다.

영화 속에서 공리는 참사랑이라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품고 실천하는 망부석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쁜 여자다. 자신을 사랑하고 심지어는 자신도 사랑하는 남편에게 곁을 내주지 않고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서 자신의 노예로 삼아버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7년 전을 배경 삼고, 사건의 발단은 반혁명분자로 10년간 복역중인 진도명의 탈주로 시작된다. 남편이 탈주했다는 사실을 공리는 딸의 학교에 불려가 딸과 함께 듣는다. 만약 진도명이 집으로 찾아오면 두 사람은 신고를 해야한다는 협박과 다짐을 받는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딸의 반응은 야멸차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므로 당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힘차게 선언한다. 무용학교를 다니는 딸은 곧 다가오는 발표회에서 주인공을 맡고 싶은 열망때문에 더욱 그럴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공리와 진도명의 인생은 딸의 야망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진도명은 집으로 찾아오지만 공리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딸과 마주친다. 딸은 공안부 요원에게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이를 목격한 공리는 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남편을 만나러 떠난다. 딸의 신고로 뒤쫓아온 공안부 요원과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공리는 머리를 다친다. 그리고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맞는다. 세상이 바뀌자 진도명은 무죄로 석방이 된다. 기쁨에 들떠 집으로 돌아오지만 공리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알고보니 공리는 진도명의 얼굴을 잊어버렸다. 심인성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딸은 모든 사진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파내버려 얼굴을 대조하여 증명할 길도 없어졌다. 주변의 기억들이 자꾸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 공리가 각인하고 있는 사실은 딱 두 가지이다. 딸의 불효와 남편이 5일에 돌아온다는 사실… 그래서 공리는 매 월 5일이면 남편인 진도명을 마중하러 나간다. 진도명은 자신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수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지만 공리의 기억 속에 있는 진도명은 젊은 시절의 그 모습 뿐이다. 역에서 돌아오는 척을 해도 예전에 즐겨 치던 피아노 곡을 연주해도 편지를 읽어주어도 늙은 진도명은 남편이 아닌 낯선 남자일 뿐이다. 아내를 눈 앞에 두고도 집을 지척에 두고도 곁에 다가설 수 없는 남자. 자신을 끔찍이 기다리는 아내의 곁에서 이름을 잃어버린 채 그 아내를 돌보며 늙어가는 남자, 그 진도명에게 공리는 한없이 나쁜 여자다.

우리는 흔히 나쁜 여자, 좋은 여자를 도덕적 관념과 세속의 기준으로써 절대적으로 구분하려는 습성을 가진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은 하 복잡하여 나쁜 여자라고 꼭 나쁘라는 법 없고 좋은 여자라고 꼭 좋으라는 법 없이 대상 안에 투영된 모습으로 그 가치가 판가름나게 된다. 상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느냐 나쁜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 나빠도 좋을 수 있고 좋아도 나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거꾸로 해석하면 나 자신이 상대를 좋게도 만들 수 있고 나쁘게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내가 나쁜 일을 당했을 때 교훈으로 삼고, 좋은 일을 겪으면서 그 가치를 배우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상대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원리이다. 그래서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세상이 되려면 내가 좋은 시선, 좋은 마음, 좋은 귀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