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분다. 융숭하게 분다. 집 앞 산자락이 만원버스에 실린 손님모양 이리 쏠렸다 저리 쏠린다. 앞 산에서 갑자기 뿌옇게 먼지가 일어서 쳐다보니 그토록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솔나무나 잣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에 켜켜이 얹혀있던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모양이다. 막 차가 지나간 메마른 황톳길이나 하얀 소독약이 분사되는 트럭 뒤꽁무니 풍경처럼 하늘에는 꽃가루가 거침없이 서렸다. 그 위상이 대단했다. 저 가루들이 바람을 타고 날다가 누군가의 어깨나 머리, 자동차나 장독대, 호숫물이나 날다람쥐나 고라니의 등 위에 내려앉으면 봄의 한 때는 그렇게 노란물이 드는 모양이다. 웅장한 자연생태의 한 장을 목도한 감흥이 꽤 가슴에 남아서 나는 우두망찰 창 밖을 한동안이나 바라보았다. 

혹시 몰라 목에 스카프 한 장 더 두르고 그 바람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도서관 가는 길이다. 나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심심하거나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싶을 때 도서관이 생각난다.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빌리고 랩탑을 가져가서 글도 쓴다. 한국의 공공도서관에서 개인실이나 서재처럼 꾸며진 곳은 아직 보지 못했다. 책을 열람할 수 있는 곳은 대부분  여섯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나무 테이블이 나란하게 놓여있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커다란 독서실 분위기로 꾸며놓은 열람실은 어느 도서관이든 필수적으로 있는 듯 하다. 요즈음은 미디어실도 있어서 영화나 음악 혹은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나는 형식은 미국 도서관이 좋고 알맹이는 한국 도서관이 좋다.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형식보다는 내용이 되겠지만 미국의 도서관들은 뭐랄까, 조금더 서재같은 인상을 주고 안락한 분위기를 연출해 놓아서 철제 프레임을 늘어놓고 책들만 주르륵 꽂아놓은 멋없는 한국 도서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매사추세츠의 중앙도서관에 가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안락하게 꾸며진 대규모 공부방이 있다. 서로 연결돼 있긴 하지만 고급스러운 진갈색 책상은 여러 참고서적을 펴놓고 공부하기에 부족함이 없을만큼 공간확보가 되었고 개인용 스탠드가 각각 붙어 있어서 조명조절도 가능하다. 공부가 절로 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욕심이 난다.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동네의 도서관은 다운타운에 있었는데 도서관에 있다가 잠시 밖으로 나오면 공원에 놀러온 기분이나 관광하는 감흥이 들어서 스트레스가 절로 풀렸다. 무엇보다 널찍널찍한 공간이 곳곳에 확보되고 4인용 테이블 한 두 개로 채워진 개인 서재같은 룸room이 많아서 때로는 우리 가족만 들어가서 집처럼 편하게 머물다 올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집은 거택이고 이 곳은 우리 서재야, 고풍스러우며 훌륭한 장서로 가득찬 보물창고지… 뭐 그런 상상을 하자고 아이들을 꼬시기도 했다. 좁은 집에 살 때여서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사실 14년이나 살았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미국의 환경이 그리운 건 당연한 일이지만 영어책을 선호하지 않았던 내가 별반 읽을 책도 없는 미국 도서관을 그리워하는 것은 좀 겸연쩍은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미국에 사는 동안 늘상 한국의 종로서적이나 교보문고, 공공도서관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은 도미 전까지 까딱하면 달려가던 곳이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나 주간 베스트셀러를 알고 싶을 때(지금처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신간서적을 고르기 위해 맛보기를 할 때 종로서적은 최적의 장소였다.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할 때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면 서점에 직접 가서 내용을 읽어보고 살 수 있다는 사실도 혜택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종로서적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고향마을이 수몰된 것처럼 어찌나 안타깝던지…

가끔은 넓은 세상을 알고 있는 일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엇갈릴 때가 있다. 지구촌을 이해하고 리드하고 전망하고 해결책을 강구하기엔 당연히 장점인데, 어디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으니 좋은 점들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면 머릿속에선 또 다른 세상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이 곳의 장점과 저 곳의 장점이 섞인 파라다이스 같은 거를 꿈꾸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파워가 있으면 좋다. 그런 신세계를 만들면 되니까.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너른 세상을 경험하고 곳곳의 장점과 장점을 익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데 일조하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도서관의 형식과 한국 도서가 함께 하는 힌극 공공도서관은 독서와 학구열을 부추기며 더 많은 도서관 팬들을 만들지 않을까 싶다.^^

도서관 계단을 오른다. 몇 칸 걸러 하나씩 책을 숭상하는 표어들이 붙어있다.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이다, 목적이 없는 독서는 산보일 뿐이다, 책은 한권 한권이 하나의 세계다, 좋은 책은 좋은 친구와 같다, 훌륭한 독서는 우리를 바르게 성장시켜 준다, 독서는 가장 손쉽게 경험을 쌓는 방법이다, 독서는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양서는 인간의 영혼을 채워서 촉촉하게 해준다. 현실에서 메마른 마음과 정신을 맞닥뜨릴 때면 혹 강풍에 씨앗이 널리널리 퍼진 스마트폰 영향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의 따뜻하고 바른 인성을 위해 1700년대에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을 했다면 이제 우리는 책으로 돌아가라는 표어를 만들어야 할 시대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