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결국 GED(미국 검정고시)를 보기로 했다. 딸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는 현행 교육법상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학업우수자인 경우는 담임의 추천으로 3월중 이사회?에 상정해서 허락이 떨어지면 각 학과목 시험을 봐서 합격점 이상을 받고 조기졸업을 할 수 있다지만 딸아이는 (한국에서) 학업우수자에 해당되지 않았고, 과학고등학교 등에서 대학합격자가 조기졸업이 가능한 경우는 해당 커리큘럼을 2년 안에 다 끝마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기중 외국 대학에 합격한 전례도 없을 뿐더러 근래에 조기졸업생 배출도 없었기에 막연히 대학에 합격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말씀하셨던 여러 선생님들은 난감해 하셨다. 딸아이도 2년동안 정들었던 학교의 졸업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저으기 실망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입학예정인 미국대학교에서는 워낙에 특수한 경우이니 졸업장 없이 입학할 수 있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GED를 추천한다는 입학사정관은 (미국대학은 입학보다 졸업이 어려운 관계로) 혹여라도 졸업을 못 하는 경우 학력이 중학교 졸업으로 남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딸아이는 그의 조언도 받아들였고 미국에서 2년, 한국에서 2년동안 고등학교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검정고시 출신이 되는 운명도 받아들였다.

시험장소가 시청 뒷편이어서 나는 시청앞 광장을 돌다가 옛 시청사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개관한 서울도서관을 기웃거리다가 덕수궁에서 궁 안내를 받으며 덕수궁의 처연했던 역사를 공부하고 석조전 내부도 투어했다. 서울도서관은 멋져서 근처에 산다면 매일 들락거리고 싶었고 석조전의 내부는 익숙함으로 가득했다. 미국 옛 거부들의 성(castle)처럼 다수의 침실과 접객실, 다이닝룸과 화장실 등이 서양식 가구로 꾸며진 데다 침대와 커텐까지 내부를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대가 있었지만 조선말 석조전을 사용했던 로열 패밀리는 옆에다 이불을 깔고 주무셨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1900년대 초, 조선에 침대라…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여행의 묘미다. 덕수궁의 내력 또한 덕수궁이라는 이름과 돌담길과 연인이 주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애사가 깃들여져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보통은 선조 임금이 돌아가시면 태자가 왕위에 즉위하는데 헤이그 특사 등으로 일본의 미움을 산 고종을 강제 하위시키기 위해 일본정부가 순종을 왕으로 추대해서 즉위식을 가졌던 곳이 덕수궁 내 한 정전이었다. 그 날 즉위식에는 고종도 순종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수궁은 본래 개인의 저택을 궁궐로 개축한 것으로 그만한 사연이 있었고 조선시대 궁궐가운데 가장 작은 규모라고 했다.

나는 점점 안내를 받는 여행에 매력을 느끼는데 그건 관광이 아닌 진정한 여행을 원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관광과 여행을 이렇게 구분했다. 관광은 태양이 나부끼는 곳에서 밝은 빛을 보는 여정이지만 여행은 그 빛 뒤에 감추어진 어두운 내면까지 들여다 보는 것이라고… 인생고개 40년 쯤 넘어가면 슬슬 터득하게 되는 사유의 미학과도 일치한다. 가이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의 세밀함을 밝혀주는 사람같다. 깃발여행은 노우 땡큐지만 각지에 상주하는 안내원들의 설명을 듣는 일은 여행의 깊이를 더해주므로 적극 권유한다.

무사히 시험을 마치고 나온 딸과 랑데뷰를 하고 예정대로 서울대학교에 갔다. 유수의 다른 대학들은 같이 투어를 했었는데 서울대학교는 처음이었다. 캠퍼스가 20여년 전보다 한층 더 레벨 업이 된 건 타 대학들과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두어개 단과대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어서 딸아이는 한국대학의 축제를 슬몃 엿볼 수 있었는데 파전과 홍합탕과 음료와 알코올… 축제문화는 그 옛날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긴 하루를 마감하는 피날레로 딸아이와 나는 헌혈실을 찾았다. 축제장을 돌아다니는 헌혈권장 피켓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딸아이에게 우리 헌혈할래? 하고 물었다. 누군가에게 내 깨끗한 피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체험시켜주고 싶었다. 딸아이는 흔쾌히 가녀린 목을 끄덕였다. 오늘은 서울 가서 길게 시험보고 헌혈하고 왔네요…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하품을 빼물며 딸아이는 그런 말을 했다. 매우 흡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하는 얄궂은 투정이었다.

-5월말의 어느 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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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새삼 생각난 이유는 요즘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김정윤양 사건 때문입니다. 수학천재로 하바드와 스탠포드 동시 입학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동갑인 딸도 함께 경탄하며 축하했었지요. 그녀의 얼굴, 똑부러지는 인터뷰, 미래에대한 포부… 마치 내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모두 헛 것이라네요. 머리가 한동안 어지러웠습니다. 내가 들은 그녀의 말과 행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모두 거짓이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많은 이들이 분노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지만, 나는 그냥 슬펐습니다. 왠지 원인은 한 가지에 있는 듯 보였습니다. 

꽃다운 나이를 거짓으로 일관하기엔 우리 아이들이 아까운 생명을 가졌습니다. 제 딸아이에게 검정고시다 봉사활동이다 헌혈이다 아르바이트다… 체험하게하는 제 자신이 (본인이 결정하지만) 조금 가혹한 엄마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또 아빠가 무엇이 바른 인생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희망찬 미래를 보장하는,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선의 세상이라는 생각이 저는 확고한 모양입니다. 5월의 어느 날에 딸아이와 제가 보냈던 하루, 시험날이라기 보다는 서울여행을 간다고 떠났던 그 하루의 일상이 자랑질처럼 들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윤양의 사건을 통해 아이들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