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찬홈 속에서…
통영에 갔다. 하필 태풍 찬홈이 중국을 강타할 거라는 예보가 들리던 즈음이었다. 거제, 통영행은 몇 주 전부터 예정해 놓은 소풍이었고 조금이라도 맑은 하늘이 보장된다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정이었다. 사흘을 이틀로 줄이고 하루는 햇볓 속에, 하루는 비바람 속에 들어있을 통영이라도 기꺼이 만나자, 하고 떠났다.
허나 비는 첫날부터 흩뿌렸다. 한국의 기상청 예측이 빗나간 탓이었지만 덕분에 여행을 감행할 수 있어서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연일 비소식만 있었다면 아무래도 소풍은 물건너 갔으리라.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 가끔은 다행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게 인간의 정도일 것이다. 그런 후에 맞닥뜨리는 허술한 결과는 내 탓이라 생각하면 되는 거고…
내게 탓을 돌리면 남 원망할 일이 없어서 가슴이 편하다. 내가 조금 더 지혜로웠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다음번엔 더 신중해 진다. 반면 가끔 맞닥뜨리게 되는 행운은 내가 한 일 같지 않아서,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난 후부터 찾아오는 내 마음의 행보다. 감사함은 뻐김이나 자만보다 나를 더 순하게 만들고 나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 자만을 가지면 그것으로 끝나거나 남이 알아주지 않을 때 억울함이 쌓이지만 누군가에게 혹은 꼭 대상이 없을 지라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면 기쁨은 배가 된다. 그건 감사를 해보면 아는 일이다.
통영에 도착했을 때, 비는 바람없이 내렸다, 푸슬푸슬... 그러므로 파도가 거세지기 전에 먼저 배를 타야 했다. 통영이 원조인 충무김밥을 사서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오징어 무침과 감칠맛 나는 무와 김에 돌돌 말린 밥을, 배를 기다리는 동안 차 안에서 젖은 하늘을 바라보며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먹었다.
장승포항에서 30분 가량 바다로 나가면 외도라는 섬이 있다. 입소문으로 그 어여쁨이 양귀비를 능가하는 유인도다. 실물은 상상보다 근사했다. 내겐 자연만의 자연도 훌륭하지만 인간의 손길로 다듬어진 자연은 이상스레 천국같다는 느낌이 밀려든다. 아마도 천국에는 하나님과 천사와 수많은 영혼들이 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는 때문일지 모르겠다. 계단도 있고 벤치도 있고 조각상도 있고 동글동글 이발한 나무와 조화를 이루는 꽃밭, 그리고 정갈한 화장실과 레스토랑쯤 있으면 누군가 살기에 안락한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외도는 그 풍광이 극도로 안락하고 아름답고 한 시야에 산과 바다와 정원과 인간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 그야말로 천상같았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도 남을 욕하거나 경적을 울리거나 시기하거나 배반하는 일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가 보다.
태풍의 영향때문에 막배가 취소되어 마지막 승선자가 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시간 30분. 크지 않은 외도는 빠른 걸음의 관광객이라면 30분도 충분했다. 단 진정한 여행가가 이젠 됐다며 안녕을 고할 마음이 생기기 까지는 하루종일이라도 모자를 듯 싶었다.
약속된 시간 5분 전에 선착장으로 갔건만 비를 맞고 서계시는 부선장님의 손목이 우리를 향해 사정없이 까딱였다. 파도가 거세져서 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마지막 승객이 된 우리가 타자마자 그랑프리호는 일렁이는 바다 위를 홉스코치하 듯 더욱이 통통대며 달렸다. 통통배가 아니라 제트스키 같았다. 빠른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움직임이 날래야 할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통통배가 제트스키처럼 달리니 비상사태라는 감이 물씬 풍겼다. 열린 비상구 안으로 잿빛 바닷물이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어 눈과 뺨과 입술에 소금맛 테러를 가했다. 맨 앞자리에 앉은 승객의 운명이었다.
찬홈이 중국을 강타할 때 통영의 세상천지에는 무늬가 새겨졌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물결무늬가, 허공에는 세로무늬와 빗살무늬 때때로 광란의 가로무늬마저 새겨졌다. 바다는 발정난 개구리처럼 날뛰고 그 안에서 죽은 자의 무덤처럼 침잠한 섬들이 그토록 무력해 보일 수가 없었다. 우산은 살이 부러지고 주차된 차는 단단한 손에 붙잡혀 엉덩이를 얻어맞는 개구장이 같았다.
세상은 그야말로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놈, 찬홈… 그 놈 참 무서운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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