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실수해서 배우다
도미해서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남편의 지도교수님 댁에서 열리는 홈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미국집이라 설레임 반, 호기심 반으로 발소리가 또각댔다. 사람들은 부엌에 차려진 음식들을 각자의 접시에 담아 곳곳에서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알고보니 미국 파티의 전형이라고 했다.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부엌으로 안내되어 Help yourself!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 나는 참고 있던 볼일을 보고 싶었고, 아무래도 사람들도 모여있고 음식이 있는 장소이다보니 toilet이란 말을 꺼내기 보다는 영어회화책에서 좋은 매너라 추천했던 Where can I wash my hands?란 문장을 사용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모님께 그렇게 물었다. 사모님은 여기서 씻어요, 라며 경쾌한 몸짓으로 앞에 있는 부엌 싱크를 가리켰다. 엉???? 꿀먹은 내 이마에서는 급격히 수많은 물음표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에둘러 말하는 것이 정중한 표현인 것처럼 씌여 있던 회화책에 배신감이 일면서 머리 속이 헝클어졌다. 당연히 상황의 빠른 복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장 하나를 말하려면 미리 주어 동사 목적어 등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시제를 맞춘 후에도 몇 번을 속으로 반복한 후에야 입에서 영어가 나왔던 시절이므로 그건 내 능력밖의 일이기도 했다. 아니 그럼 미국에선 그 표현이 화장실에 가고싶다는 의미로 통용되지 않는다는 건가요? 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ㅠㅠ 사실은 화장실이 급하답니다… 내 말 없는 절규를 이마에서 읽으시고 교수님은 나를 화장실로 안내해 주셨다. 화장실 문을 닫고 혼자가 된 순간, 사모님의 “쟈 왜 저러나?” 라는 표정이 불뚝 떠올랐다. 이후 내내 사모님의 데면데면한 태도는 내 첫인상으로 인한 후유증이라는 생각을 한다. 손 씻고 싶대서 손 씻을 곳을 알려주었더니 입술은 닫고 이상한 표정만 짓는 동양에서 온 조그만 여자. 어떨 때는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면서 어떤 때는 농담을 건네도 대답없이 미묘한 미소만 짓고 있는 여자.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을 나 자신을 설명할 길 없이 흘려버린 그 시간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큰 아이가 3살 무렵에 다니던 프리스쿨의 담임선생님은 내 ESL 선생님의 부인이셨다. 미국의 많은 학교에서 그렇듯이 하교 때면 부모를 차에서 못 내리게 하고 선생님들이 보호자를 확인한 후 아이를 승차시키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연로하신데다 마른 부인이 아이를 들어 카시트에 태우는 모습이 항상 버겁게 느껴져서 미안미안 했는데 하루는 정말 너무 힘겨워 보이는 것이다. 두세번 시도를 하는 모습을 보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에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함을 담뿍 담은 내 마음이었다. 아이고, 힘드시죠, 감사합니다,의 의미였다. 이어 어줍쟎게 Thank you a lot (Thank you very much나 many thanks 등이 더 바람직하다, Thanks a lot은 비아냥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을 말하고 떠나는데 부인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고 이후로는 전처럼 다정하게 굴지 않으셨다. 이후 나는 ESL선생님 부부를 집에 초대해서 한국음식을 대접했다. 막 디저트를 가지러 냉장고쪽으로 갔을 때 마침 남편은 아이와 함께 잠시 식탁을 떠났던 걸로 기억한다. ESL선생님이 부인에게 소곤소곤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See, she has good manners! 역시 부인은 그때의 내 언사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큰 아이가 4살 때였으니 도미해서 약 2년이 지난 시기였나보다. 이제는 웬만큼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미국생활이라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큰 아이가 다니던 pre-k에서 엄마들이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언제한다는 말만 입에서 입으로 전달받은 나는 그날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컨테이너에 담아갔다. 그리고 음료와 컵케잌과 쿠키 등이 놓여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선생님을 도와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한 엄마가 매우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꺼림직한 눈길이었다. 이후 그 엄마는 나와 마주쳐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별로 신경쓸 사람이 아니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파티를 코디네이트 했던 그 엄마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과자를 가져가서 나누어주었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보통 학교에서 파티를 준비할 때는 일정 리스트에 미리 사인업을 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것이다.
큰 아이가 5살 때 일이다. 큰 아이에게 아주 스위트한 친구가 있었다. 뭘 해도 예뻐 보이는 그 아이가 우리집에서 놀다가 무언가 실수를 했을 때였다. 나는 별것이 아닌데 당황해하는 그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호호호 웃었다. 나름대로 그건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말라는 제스츄어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심은 커녕 그 앙증맞고 귀여운 얼굴에 노여움이 깃들었다.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 확연했다. 그래서 또 깨달았다. 미국에서는 타인이 실수하면 절대 웃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 웃음을 비웃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이렇게 나는 한가지 실수를 할 때마다 한가지 미국 문화 터득하기를 반복하며 14년간을 살아왔다. 물론 후반기로 갈수록 당혹스런 일들이 급격히 줄었고 10여년 뒤부터는 꽤 익숙해진 그 문화가 나를 지배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서 또다른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미국에서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무슨 일인가?를 궁리하다 뒤늦게 밀려오는 깨달음에 해명이나 대처를 못 했다는 안타까움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 비교적 센스가 빠른 나는 상대가 이상하단 눈치를 보이면 바로 캐치하고 즉시 질문을 해댄다. 그래야 빨리 배우고 바뀐 문화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상황이면 겸연쩍게 웃으며 제가 외국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요… 한다. 그러면 그들은 바로 아~ 그러신 것 같았어요, 라고 말한다. 실수가 곧바로 이해로 통하는 비결, 그것은 한민족이란 공통분모와 대화를 이끌 수 있는 유창한 언어에 있겠다.
실수 범벅이었던 그 추억도 이제는 많이 소중하다. 그리고 실수는 배우기위해 거치는 통과의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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