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탈출하자

길을 가는데 누군가 자신의 친구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생각으로 혹은 고정관념으로 모든 사물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한국에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공연히 허공 한번 쳐다봤다.

우스개 소리를 해야겠다. 몸이 지쳐서 사우나에 갔다가 도저히 때 밀 기력이 없어서 때밀이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주머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한테 맞았는가 부네요.” 아마도 물대포를 장시간 쏘인 탓으로 내 몸 여기저기에 멍이 생겼던가 보다. 나는 원래 멍이 잘 든다. 그때 왠지 서글펐다. 그 아주머니의 시선이 안타까워서였다. 아마도 본인의 경험이거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여자의 몸에 생긴 멍'은 '남편의 폭력자국'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나 보다. 그렇다고 애먼 남편을 폭군으로 놔두기도 그래서 아니라고, 물안마를 오래 한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지만 숨기고 싶은 마음 이해한다는 반응이 나와서 오히려 어찌할 바를 몰랐던 적이 있다. 기왕 남편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왔으니 하나 더 슬픈 우스개 소리를 하자면 결혼 후 시어머님께서 남편을 안 된 시선으로 보시거나 불쌍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몇 차례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결혼 전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았는데 결혼한 후부터는 가사와 육아 등 궂은 일을 솔선해서 하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친정 어머니가 나를 불쌍하다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결혼한 딸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며 사는 중이었는데 왜 유독 시어머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까. 그때는 속으로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이 들어 사리판단이 늘어서인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첫째, 한국은 남녀의 역할이 고정화 된 탓이고 둘째, 어머님은 남편의 실제 모습과는 상관없이 당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셨기 때문이다. 그건 때밀이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고 위에서 예를 든 길 가던 사람의 친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보고 싶은대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객관성이 결여되어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발생시킨다.

여성 대통령이 탄생되고 여성상위라는 단어는 이미 만연된 사회현상이고 대학에서는 합격생들의 과반수 이상이 여학생인 이 시대에도 한국의 전통가풍에는 남녀불평등이 잔존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명절날은 우선적으로 남편의 집에 먼저 간다. 물론 예로부터 차례를 지낼 때 딸자식은 제외되었다. 철저하게 지아비의 가계에 종속될 사람이라는 의식때문이지만 시집을 가도 여자는 시댁조상님께 절조차 올리지 못했다. 차례와 제사는 남성우월주의의 결정체다(지금은 남녀 같이 하는 집도 있지만…). 여자는 명절날 일만 하는 처지였다. 이젠 시대가 변했다. 2013년 설문조사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30%였으니 2015년에는 조금 더 늘었을 것이다. 남성이 우월하지도 않고 시집 간 딸을 남의 자식으로 생각하는 시대도 아니다. 명절날 남자의 집이 우선,이라는 사고는 유교식 차례를 지내고 남성이 우월하고 시집 간 딸은 남의 집 사람인 시대의 발상이다. 땅덩이가 넓어서 이동이 여의롭지 않은 미국은 추수감사절에 친가에 간다면 크리스마스 때는 친정으로 가는 공평한 명절맞이를 한다. 미국문화 따라하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현대식 의식구조를 우리 실정에 맞게 도입해야한다.

2, 남편은 아내의 동생을 아내와 똑같이 동생으로 대할 수 있다. 처남이나 처제에게 반말은 물론이고 다정하게 이름도 부를 수 있다. 반면 아내는 남편보다 서열이 낮은 형제나 친척에게 존대를 쓰고 아가씨나 도련님, 혹은 서방님이라는 익숙치 않은 존칭을 써야한다. 그게 어색하면 고모나 작은 아빠라는 아이들 기준의 호칭을 쓴다. 서방님이란 단어는 참 이상하다. 내 서방은 따로 있는데 왜 결혼한 시동생을 그렇게 불러야 하나. 그리고 동생한테 왜 존대를 해야하는가. 동생을 동생으로 대한다면 사리에 맞아 정도 가고 누나처럼 챙겨줄 마음이 더 생길 법 하다.

3, 한국에서 사위는 처가에 의무사항같은 게 없다. 반면 며느리는 시부모를 공양하고 시댁에서 일을 해야 마땅한 입장이다. 며느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시어머님들이 늘고 있지만 당연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무언가 혜택을 준다는 느낌을 가진다. 장모는 사위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 이상한 문화다. 며느리를 낳고 키운 사람은 사부인이다. 내 아들과 결혼하기 전까지 며느리에게 시부모는 해 준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전통의식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에게 의무를 지우는가. 남녀차별에서 비롯된 그릇된 관습이다. 모든 일은 인간적 순리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의식구조를 없애고 내 아들과 한 몸이니 내 아들처럼 며느리를 위하고 사랑하기, 또 내 남편의 부모이므로 내 부모처럼 공경하고 사랑하기 문화를 키우자. 그러면 고부갈등이 없어지고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4, 효라는 말을 들여다 보자. 효에는 상호간의 관계성립보다는 일방적인 강제성이 있다.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목숨도 아깝지 않게 한다. 사랑을 주고받으면 즐겁고 행복하다. 요즈음 한국의 어르신 세계에서는 자식에게 기대하지 말자는 캠페인이 성행한다. 자식한테 줄 것 없고 자식한테 바라지 말자고 한다. 씁쓸하다. 무언가 계산이 가득한 표현... 서양식 사랑문화가 이상하게 전파되는 느낌이다. 의무가 아니라 마음을 사는 일, 이것이 사랑이고 이는 서로에게 득이 된다. 사랑하면 효는 절로 이루어진다.

이런 비유가 맞을 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나오는 비유같은 거 말이다.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포박당해 동굴의 벽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뒤 쪽에서 비춰지는 횟불에 의해 동굴벽에 드리워진 사물과 사람, 동식물의 그림자만 바라보고 사는 그들은 그림자를 실체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만약 그들중 한 사람이 동굴의 입구로 간다면 비로소 그림자가 실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돌아와 그림자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행히 지금은 많은 사람이 동굴밖을 보고 느끼는 시대이다. 그래도 이것이 전통이므로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묶인 사람, 혹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느라 객관성을 상실한 시선이다.

한국문화를 비판없이 수용해 왔고 한국문화에만 익숙한 분들께는 공분을 살만한 반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이 현실적이지 않고 불합리하다면 우리는 동굴밖으로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