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애잔하다. 

깊어가는 애잔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노라면, 내 안으로부터 툭툭 두드림이 울려 퍼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같은 경험을 나는 제법 여러 해에 걸쳐 비슷한 절기마다 반복해오고 있다. 그 두드림의 여운이란 마치 누군가 내 마음에 훅—하고 들어왔을 때 느끼는 그 오묘한 감정과도 비슷하고, 또 한편으로 어느 격식 있는 모임으로부터 정중한 초대장을 받았을 때의 느낌과도 유사하다. 여하튼 나는 그 두드림을 “나의 내면으로부터의 초대”라고 이름 지어주기로 했다. 이것은 나의 의식(意識)으로 마주하는 나만의 의식(儀式)이기도 하다. 나 자신의 마음자리를 살피는 자기 검열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기분이 노을처럼 내 마음을 물들일 때마다 찾게 되는 몇 권의 책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여러분께 오늘 소개해드리고 싶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이다. 10대에 만난 ‘무소유’는 수수께끼였고, 20대에만 난 ‘무소유’는 낭만이었고, 30대에 만난 ‘무소유’는 도전이었고, 40대에 만난 ‘무소유’는 삶의 철학이 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그동안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내가 이 책과 함께한 세월도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다. ‘사람이 책과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좋은 사람뿐만 아니라 좋은 글도 오랜 벗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9년 전 봄, 법정 스님께서 입적하셨을 때 나는 이곳에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을 <무소유>에서 발췌해서 올린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글을 올린 지 불과 석 달을 못 넘기고 이번에는 우리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생전 법정 스님은 임종을 앞둔 마지막 밤을 길상사에서 보내셨고, 우리 할머니는 사후 위패가 되어 길상사에 모셔졌다. 그 후로 나에게 길상사는 자연스럽게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되었다. 한국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길상사를 찾아 두 분께 인사를 올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날에는 그곳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두 분의 명복을 빈다. 

몇 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미니멀리즘’이라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단사리’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사토리 세대’라는 인생관을 가진 젊은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한국은 ‘워라밸’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학벌/물질/외모 만능주의에 대한 반론과 대안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변화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가 느낀 끝이 없는 소유욕에 대한 두려움, 소비의 파도에 휩싸여 만족을 잃어버린 불안, 꾸역꾸역 밀려오는 생각과 정보들의 압박, 삶의 주인이 되기보다 사회와 타인의 기대를 위해 살아가는 수동적 인생에 대한 회의 등, 이런 다양한 알아차림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11월의 애잔함을 복잡하게 다스리면 마치 젖은 낙엽처럼 치덕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기에 나는 가을이 무르익기 시작하면, 간결하면서도 본질적인 법정 스님의 글을 찾게 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다수의 구도자가 그들만의 언어로 표현해온 난해한 사유 세계의 틀을 벗어나,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일상 속에서 만나는 귀한 가르침과 성장의 기회를 독자와 나눈 친절한 선지식이다. 그렇게 스님은 우리에게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즉 법정스님의 문체가 지닌 ‘여백의 미'가 독자에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자리를 선물해 주는 것이다. 

간소한 삶이 화두인 요즘, 당신의 글처럼 맑은 가난을 평생 실천하셨고,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비구 법정’ 단 두 마디가 적힌 종이 위패로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의 가르침을 주신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여러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잎을 떨구는 나무를 바라보며 다시금 '무소유'의 의미를 되새기기에도 참 좋은 계절이다. 

2019.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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