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은 Max Picard의 “The World of Silence”이다. 한국에서는 <침묵의 세계>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미 십 년 전부터 2020년에는 맡은 소임을 모두 내려놓고 안식년을 보내기로 계획하고 있었기에, 올해 첫머리부터 나는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문체가 담긴 책을 찾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면서 열심히 살아온 나의 귀와 마음을, 소박하면서도 리드미컬한 글을 읽으며 씻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우연히 나를 찾아온 책이 바로 이 작품이다. 

누군가가 독서의 의미를 물을 때마다 ‘여행’이라고 대답해온 나는, 책을 통해 수많은 곳을 걷고 달리고 날아오른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경험은 다양한 인물을 만나 서로 다른 관점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이야기를 접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다 문득 책을 아껴 읽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인생의 대부분을 책과 벗하며 살아보니 좋은 책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배웠다. 그래서 그런 작품을 만나면 감사한 마음은 더욱더 깊어지고 천천히 아껴 읽게 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시기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미 전 세계로 퍼져나갔던 6월이었다. 랄라의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를 계획 중이었던 우리 가족에게는 험난하고 긴 도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정든 집을 팔고 다시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산불처럼 번지는 코로나는 우리의 계획을 지연시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49재를 지낸 뒤부터 한층 깊어진 애도의 슬픔이 스톰을 찾아왔다. 그 무렵 랄라의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온라인으로 치러졌고, 학부모와 학생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학교 측에 다양한 질문을 던졌지만, 그들 또한 우리에게 명료한 답을 해줄 수 없는 처지였다. 타오르던 여름의 더위조차 기억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만 보냈기 때문이다. 올해의 여름은 오히려 나에게 서늘한 에어컨 바람의 온도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가 모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만큼, 이 책이 선물해 준 고요와 평화는 참으로 소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윽하고 아름다웠다. 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을 읽지 않아서 한글이 전하는 문체의 느낌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영문으로 번역된 작가의 문체에서는 단아한 기품이 전해졌다. 맑고 향기로운 글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아름다운 마무리>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당시 풀기 어려운 숙제를 짐처럼 지고 있던 우리 가족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엉키고 꼬인 문제의 실마리를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방법을 함께 배웠다. 그 무렵 내 마음자리를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을 준 책도 <침묵의 세계>이다. 덕분에 우리는 가을에 무사히 이주를 마쳤고, 올해의 마지막 달을 캘리포니아에서 맞이하고 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날은 좋고 저 날은 나쁘다는 사고로부터 헤어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진심으로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 짓는다. 잦은 분별심이 망상을 일으키고 화를 돋우며 남을 탓하게 만든다. 주변이 웅성거리고 소란스러울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균형과 중심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눈길은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해야 한다. 만약 그 여정을 함께할 길벗을 찾고 있다면, Max Picard의 <침묵의 세계>가 고요한 그곳으로 여러분을 친절히 안내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