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1일

우리는 어른이 된 후에, 특히 어떤 분야에서 조금씩 두각을 드러낼 무렵, 주위 분들로부터 '초심을 잃지 마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리고 우리가 더 나이를 먹고,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초심을 잃지 마라'는 조언을 해주며 산다.

初心이란 무엇일까? 어떤 것일까?

그건 쉽게 말해 첫 마음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우리가 처음 응애~하고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을 때, 부모와 자식 간에 흐르는 경이롭고 감사한 마음의 물결. 어린 시절 산처럼 위대한 분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던 아들의 눈빛.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공주님은 우리 엄마라고 확신하는 꼬마의 마음.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 타기에 성공한 아이의 우렁찬 외침. 설렘과 두려움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입학식에 참석한 일학년 병아리들의 비장함. 처음 호감을 갖게 된 이성의 손끝과 살짝 스치던 순간의 전율. 결혼식 날 웨딩마치와 함께 서로를 바라보는 신랑 신부의 경건한 신뢰의 눈빛. 처음 내 집 장만을 했을 때의 뿌듯한 행복. 첫 농사를 거두어 드리는 초보 귀농인의 해맑은 웃음.

세상에는 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처음’이라는 수식어만큼 큰 울림을 주는 것은 흔치 않다. 사랑도 그렇다. ‘첫사랑’은 그 단어 하나만으로 이미 시가 되기도 하고, 소설이 되기도 하고, 수필이 되기도 한다. ‘중간사랑’ ‘끝 사랑’ 이라는 말을 들으면 별 반응이 없다가도, 누군가가 “나의 첫사랑은 말이야...”라고 운을 띄우면 꼬마, 청소년, 대학생,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할 것 없이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혹 앞으로 다가올 인연을 상상하며 누군가의 ‘첫사랑’의 추억여행에 동참하는 것이다.

얼마 전은 스톰의 생일이었다. 나는 스톰의 침구를 모두 걷어내어 깨끗하게 세탁한 뒤, 새롭게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것은, 올 해 랄라의 생일날 문득 나의 잃어버렸던 ‘초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랄라가 좋아하는 선물과 카드를 모두 줬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날 뭔가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때 번뜩 하고 생각 난 것이, 다름 아닌 랄라의 이불빨래를 해주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랄라를 처음으로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 오던 날. 스톰은 온 몸이 흠뻑 젖을 만큼 열과 성을 다해 집 안 밖을 청소했다. 그리고 깨끗하게 샤워를 한 뒤, 가장 새 옷을 골라 입고, 병원으로 다시 우리를 데리러 왔다. 자동차 뒷자리에 나를 편안히 앉힌 뒤, 랄라를 카시트에 뉘이고 집으로 향하던 스톰은, 평소 같으면 겨우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를 정말 한 시간은 걸려서 온 것 같다.

그때 스톰이 어찌나 차를 천천히 몰던지 나는 답답해서 기절할 뻔 했다. 하지만 방금 전 씻고 왔다는 스톰의 이마에 송글송글 작은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아무 불평도 할 수 없었다. 스톰이 소중한 새 생명을 위해 깃털처럼 사뿐히 차를 몰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초심일 것이다. 갓난아이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 아기를 위해 최대한 아늑한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

우리는 누구나 初心을 다시 現心으로 만들 수 있다. 지금 곁에 있는 누군가가 미워 보인다면, 혹은 내 자신이 못나 보인다면,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그 초심을 다시 찾아와야 할 것이다. 그 때 그 아름답고 경이롭던 첫 마음을 지금의 마음으로 되돌리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재활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