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2일
재작년 종합검진을 받으시면서 수면 내시경 때문에 고생하셨던 엄마는 작년 여름 내가 한국에 있을 시기에 맞춰 검진 예약을 하셨다. 반나절 정도 걸릴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읽고 있던 책 한 권과 Mp3 그리고 정리해야 하는 라디오 원고를 가방에 넣어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 매년 오시는 곳이어서 그런지 엄마는 생각보다 편안하게 건강검진과 관련된 주의사항을 들으시고, 탈의실에서도 차분하게 준비를 잘하셨다. 그렇게 엄마가 검진실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배웅한 뒤, 나는 담당 간호사에게 핸드폰 번호를 적어드리며, 혹시라도 엄마가 찾으시면 검진받으시는 동안 문자로 연락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마른기침으로 아침부터 고생했던 나는 커피 한 잔과 물 한 컵을 들고, 앞으로 최소한 여섯 시간은 내 몸을 맡겨야 할 안락한 의자와 탁자를 찾아 서성였다. 그리고 로비 한 편에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고 바로 짐을 풀었다. 신발을 벗고 폴짝 의자 위에 올라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을 꺼내고, 필통을 꺼내고, 진동으로 바꿔놓은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혹시라도 독서에 너무 몰두해서 전화기의 진동을 못 느낄까 걱정된 나는 왼쪽 손으로 호주머니 안의 전화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까지는 별로 지루한 줄 모르고 앉아있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허리도 뻐근하고 다리도 불편해서 조금 걷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가방에 소지품을 담아 넣고, 엄마의 담당 간호사를 찾아가 삼십 분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을 알려드리고, 그래도 병원 안에 있을 테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로 연락 바란다고 부탁드린 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제일 먼저 지하 1층에 있는 서점에 가서 내가 구입하고 싶었던 책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는데, 점원 언니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도서목록에 있던 대부분의 책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한 손에는 책이 담긴 쇼핑백과 또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니, 바로 앞에 랄라 또래의 여자아이와 엄마가 나란히 서있었다. 엄마는 아이 것으로 보이는 깜찍한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딸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 좋았다. 창백한 얼굴의 아이는 기운이 없어 보였고, 폭삭 덮어쓴 모자 밑으로 매끄러운 뒷머리 부분이 드러나 보였다. 아무래도 소아암 환자인 듯싶었다.
순간 지금쯤 고모네 집에서 언니 오빠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랄라 생각이 났다. 랄라의 밝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싶더니, 내 눈앞에 서있는 모녀의 모습이 나와 랄라의 모습으로 겹치면서 마음 한편이 어찌나 아프던지. 나는 칼날 같은 숨을 고르고 유난히 살결이 흰 이 아이의 쾌유를 조용히 빌었다. 그리고 아이를 간병하느냐 오랜 시간 지쳤을 아이 엄마의 육신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심리적 고통을 안고 있을, 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아이 엄마에게 힘내시라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너무 잔인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우리의 행복을 투영하는 경험을 한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나의 건강에 감사하고, 다른 가족의 불화를 지켜보고 나서야 우리 가족의 화목에 감사하고, 다른 아이의 실패와 좌절을 듣고 나서야 우리 아이의 재능에 감사한다. 나 또한 랄라 나이 또래의 아이와 내 연령 정도로 보이는 아이 엄마를 바라보며, 랄라의 건강에 감사하게 되는 이런 잔인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만남으로 말미암아 감상에 젖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면 몰랐을 장면, 새로 산 책을 허겁지겁 꺼내 읽고 있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모습, 계단을 사용하거나 엘리베이터를 탔었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 우리의 인연도 비슷한 점이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다른 모양의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만남이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특별하고 소중하며 오래 기억되기도 한다.
2013년 1월 12일
재작년 종합검진을 받으시면서 수면 내시경 때문에 고생하셨던 엄마는 작년 여름 내가 한국에 있을 시기에 맞춰 검진 예약을 하셨다. 반나절 정도 걸릴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읽고 있던 책 한 권과 Mp3 그리고 정리해야 하는 라디오 원고를 가방에 넣어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 매년 오시는 곳이어서 그런지 엄마는 생각보다 편안하게 건강검진과 관련된 주의사항을 들으시고, 탈의실에서도 차분하게 준비를 잘하셨다. 그렇게 엄마가 검진실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배웅한 뒤, 나는 담당 간호사에게 핸드폰 번호를 적어드리며, 혹시라도 엄마가 찾으시면 검진받으시는 동안 문자로 연락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마른기침으로 아침부터 고생했던 나는 커피 한 잔과 물 한 컵을 들고, 앞으로 최소한 여섯 시간은 내 몸을 맡겨야 할 안락한 의자와 탁자를 찾아 서성였다. 그리고 로비 한 편에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고 바로 짐을 풀었다. 신발을 벗고 폴짝 의자 위에 올라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을 꺼내고, 필통을 꺼내고, 진동으로 바꿔놓은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혹시라도 독서에 너무 몰두해서 전화기의 진동을 못 느낄까 걱정된 나는 왼쪽 손으로 호주머니 안의 전화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까지는 별로 지루한 줄 모르고 앉아있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허리도 뻐근하고 다리도 불편해서 조금 걷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가방에 소지품을 담아 넣고, 엄마의 담당 간호사를 찾아가 삼십 분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을 알려드리고, 그래도 병원 안에 있을 테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로 연락 바란다고 부탁드린 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제일 먼저 지하 1층에 있는 서점에 가서 내가 구입하고 싶었던 책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는데, 점원 언니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도서목록에 있던 대부분의 책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한 손에는 책이 담긴 쇼핑백과 또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니, 바로 앞에 랄라 또래의 여자아이와 엄마가 나란히 서있었다. 엄마는 아이 것으로 보이는 깜찍한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딸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 좋았다. 창백한 얼굴의 아이는 기운이 없어 보였고, 폭삭 덮어쓴 모자 밑으로 매끄러운 뒷머리 부분이 드러나 보였다. 아무래도 소아암 환자인 듯싶었다.
순간 지금쯤 고모네 집에서 언니 오빠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랄라 생각이 났다. 랄라의 밝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싶더니, 내 눈앞에 서있는 모녀의 모습이 나와 랄라의 모습으로 겹치면서 마음 한편이 어찌나 아프던지. 나는 칼날 같은 숨을 고르고 유난히 살결이 흰 이 아이의 쾌유를 조용히 빌었다. 그리고 아이를 간병하느냐 오랜 시간 지쳤을 아이 엄마의 육신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심리적 고통을 안고 있을, 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아이 엄마에게 힘내시라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너무 잔인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우리의 행복을 투영하는 경험을 한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나의 건강에 감사하고, 다른 가족의 불화를 지켜보고 나서야 우리 가족의 화목에 감사하고, 다른 아이의 실패와 좌절을 듣고 나서야 우리 아이의 재능에 감사한다. 나 또한 랄라 나이 또래의 아이와 내 연령 정도로 보이는 아이 엄마를 바라보며, 랄라의 건강에 감사하게 되는 이런 잔인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지도 않은 순간 우연으로 말미암아 감상에 젖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면 몰랐을 장면, 새로 산 책을 허겁지겁 꺼내 읽고 있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모습, 계단을 사용하거나 엘리베이터를 탔었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 우리의 인연도 비슷한 점이 있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다른 모양의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필요한 책을 구입하려고 병원 서점을 찾았을 뿐인데, 이름 모를 모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책 무게보다 훨씬 육중한 무엇인가를 안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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