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0일

드디어 곳곳에 봄 내음이 나기 시작했다. 등을 비추는 햇살은 포근하고, 산들바람은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간지럽히기도 한다. 우리 모두 귀차니즘으로부터 겨울나기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밖으로 눈길을 발길을 옮겨보라는 고결한 자연으로부터의 초대이기도 하다. 늘 그래 왔듯이 우리 집은 텃밭을 일구며 봄 마중을 나간다. 스톰과 랄라와 함께 텃밭을 손질하기 위해 필요한 자재와 새로운 모종을 구하러 집을 나섰다.

나이를 먹고 인생의 우선순위가 좀 더 견고해지면서, 물건을 살 때 자제력을 잃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책과 꽃 앞에만 서면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앞선다. 오늘 나를 황홀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고즈넉한 꽃잎을 너울너울 흔들며 인사하던 양귀비. 그 색감 또한 얼마나 고운지 모른다. 하양, 노랑, 주홍, 빨강, 진분홍. 나는 양귀비가 그려진 그림, 양귀비의 씨가 들어간 빵이나 과자, 양귀비만의 고혹적인 매력 모두 좋아한다. 

심지어 아편의 재료로 쓰인다는 그녀의 독성(毒性) 마저도 내게는 신비스러운 대상이다. 장미의 가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미리 대처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만, 양귀비의 그 가냘프고 여린 춤사위 뒤에 숨겨진 깊은 중독성은 일순간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양귀비를 절세미인에 비유하는 이유도 이런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양귀비가 한 나라의 국운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폐해성을 갖고 있음은 중국의 역사를 봐도, 얼마 전에 많은 관중을 모은 영화 <광해>를 봐도 감지할 수 있다.

사람이 무언가에 호감을 갖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자기 자신과 비슷해서거나 혹은 자신이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람이나 사물이 소유하고 있는 경우라고 하는데, 내가 양귀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후자의 해석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지극히 교과서적이고, 규범과 규칙에 엄격하며, 정갈한 환경을 선호하고, 미리 계획을 세우고, 예습과 복습에 충실한 나의 성격은 양귀비의 성질과 매우 대조적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열, 환락, 탐닉에 대한 불씨를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양귀비의 고운 자태와 선명한 색감 그리고 취한 듯이 흔들리는 물결의 일렁거림을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지독히 사랑해서, 누군가를 너무도 간절히 원해서, 상대를 “나”라는 불완전한 난파선에 싣고 깊고 깊은 심해 (深海)로 함께 빠져드는 느낌. 그렇게 숨 막히는 진공과 암흑 속의 고요를 체험하는 순간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심은 양귀비는 햇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올해도 내년에도 꽃을 피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매 해마다 봄이 오면 융(C. G. Jung)이 말한 내면의 그림자(Shadow)와 함께 찰나의 일탈을 꿈꿀지도 모른다.